목포의 눈물이 뭐예요?


이 책을 산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와 함께. 그러니까 그동안, 책을 산 이후로 읽기 바로 직전까지, 이 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과 함께 나란히 책꽂이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은 것은 바로 그 날이었다. 기아가 야신이 이끄는 SK와 한국시리즈 7차전을 하던 날이었고, 두 아이의 엄청난 짜증을 들으면서 겨우겨우 TV 채널을 사수하고 있던 날이었고, 1-5로 뒤질 때 즈음에는 경기를 거의 포기하면서 보고 있던 날이었고, 드디어 기아의 3번타자 나지완이 9회말 스크의 수호신-몸집으로 따지면 수호'산'에 가깝지만- 채병용의 안쪽 높은 직구를  홈런으로 만들었던 그 날, 그래서 집에서 자축하며 캔맥주를 마셨던 날. 그 모든 일들이 있었던 날, 단 하루 만에 즐겁게 맥주를 마시면서 다 읽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김대중 대통령의 부고를 듣고 샀던 책을 기아가 우승한 날 다 읽었다. 근데 이 책의 제목이 <해태타이거즈와 김대중>이다. 그렇고 보니 김대중, 광주, 해태타이거즈가 왠지 관련이 있는 것같다. 알고보면 그 사실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누구나 대충은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80년 광주항쟁을 공수부대로 제압한 전두환정권이 정치적인 치부를 무마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수많은 프로스포츠였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로야구 였던 것이다. 그리고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했던 팀이면서, 브라보콘 팔아서 연봉을 줘야할 만큼 가난했던 팀이 바로 해태 타이거즈 였다. 근데 이 브라보콘 팀의 성적이 좀 황당하다. 15년 동안 9번의 우승이라......  


이 모든 것은  왠만한 야구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이게 뭐 새로운가?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전혀 새롭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하지만 그 점이 이 책의, 또는 야구의 진정한 가치가 아닌가 싶다. 아무리 정치적인 의도로 시작했어도 십 년이 되고 이 십년이 되고, 삼십년이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전두환과 정치권의 의도가 아니라 야구다. 정치는 떠나고 야구만이 남는 것이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실망하고, 감동했던 것. 그것이 어떻게 시작했건간에 그건 야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신선하지도 새롭지도 않지만 재미있다. 왜냐하면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이 전두환 정권의 탄생과 광주항쟁의 의미도, 그들이 야구를 어떻게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했는가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단지 한국 '야구'일 뿐이다.    


기아가 우승하는 순간, 잠실구장의 기아 응원석에서는 해태타이거즈의 응원가였던 '목포의 눈물'이 흘러 나왔다. 그런데 왠걸? 아무도 따라 부르는 이가 없어서 중간에 그만 뒀다고 한다.'김대중-광주 민주항쟁-해태타이거즈-목포의 눈물' 로 이어지는 무조건 반사와도 같은 연쇄반응이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2009년의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브라보콘을 파는 해태의 타이거즈가 아니라 오피러스와 K7을 수출하는 기아의 타이거즈이기 때문이다. 이종범의 말처럼 기아타이거즈 선수들도 예전처럼 전라도 출신이 주축이 아니다. 7차전에서 홈런을 터뜨린 안치홍, 나지완 모두 서울 출신의 선수들이고, 기아의 팬들 또한 전라도라는 지역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기아 팬들이 '목포의 눈물'에 꿀먹은 벙어리일 수 밖에! 


안타깝지만 해태 타이거즈는 이제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15년만에 V9를 달성했던 전무후무한 강팀의 전설은 이제 사람들의 뇌리에 아련한 추억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리 떠올려 보려 해도 더이상 그들의 모습이 쉽게 떠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가 그런 것처럼. 

하지만 누가 알랴? 언젠가 그분과 그들의 정신이 필요할 때가 있을지. 

by gosoo71 | 2009/11/17 17:51 | 책과 나 | 트랙백 | 덧글(2)

드라마냐 퍼포먼스냐, 그것이 문제로다



1. 또 다른 가을의 전설
최근 이 년동안 내가 읽은 책들을 아우르는 키워드는 '이청준'과 '글쓰기' 였다. 이를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 얘기한다면, '60년대 한국문학'과 '논문'이 이 년동안 내 독서의 키워드이면서, 동시에 내 일상의 키워드이기도 했다. 자나깨나 그 생각. 뭐? 아! 그 놈의 논문! 하지만... 논문은 이제 끝났고, 그와 동시에 이 키워드들도 나로부터 멀어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60년대 한국문학'을 더이상 읽지 않는다거나, '글쓰기'에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언젠가 서정인의 소설들을 다시 읽어 봐야 하고, 빠른 시일내에 최인훈 전집 중에서 미처 구입하지 못한 책들을 사야 하고, 내년 수업을 위해서 마종기 시 전집을 읽어야 한다.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이 '-해야 한다'라는 당위라기 보다는 '-하고 싶다'는 소망에 더 가깝다. 문제는 이 모든 책들을 읽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럼, 요즘 내 일상, 또는 독서의 키워드는? 1학기 논문 심사가 끝난 후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라는 수업이었다. 그래서 2학기의 키워드는 이 수업에 등장했던 네 명의 작가였다. 셰익스피어, 까뮈, 이청준(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중에서 가장 공을 들인 작가는 셰익스피어였는데, 그 것은 곧, 셰익스피어라는 작가이기도 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쓴 작품들이기도 하면서, 셰익스피어가 포함되어 있는 연극 전체에 대한 열망이기도 했다. 근데, 이 수업도 끝났다. 그리고 <문학, 의학...>수업이 끝나면서 후두둑 떨어져 은행들과 보도블럭을 뒹굴고 있는 낙엽들과 함께 가을이 훌쩍 와버렸다. 떨어진 잎들이 무색하게도 아직도 낮기온이 이십도에 이를 정도로 포근하긴 하지만...... 어쨌든 가을은 왔다. 

가을이니까 어딘가 허전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찌질한 궁상 따위는 집어 치우자. 사실 가을은 좋은 계절이다. 왜냐고? 가을의 전설이 기다리고 있는 포스트 시즌 야구가 있는 계절이니까! 만세! 기아 우승!!! 물론 가을은 야구 팬들에게는 가을의 전설을 관람하기 위한 계절이지만, 동시에 연극을 위한 계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기에는 일년중 가장 좋은 연극들이 가장 많이 공연되기 때문이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가 시작되었다. 올해의 주제는 '셰익스피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예술제에 초청된 극단들이 모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연극, 무용, 퍼포먼스, 인형극......프로그램을 살펴보니, 이 중에 두 편의 <햄릿>이 공연된다. 하나는 극단 여행자가 양정웅 연출로 올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탈리아 극단의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서울 국제 공연예술제 출품작은 아니지만 연희단 거리패의 고정 레퍼토리인 <햄릿>이 눈빛극장 개관기념으로 공연된다. 그러니 올 가을에는 세 편의 <햄릿>이 오르는 것이다. 세 편 모두를 보려 했는데, 이탈리아 극단의 것이 시간이 안 맞는다. 가장 보고 싶은 공연이었는데......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2. 한세기 지켜온 민족의 얼

   
90년대에, 그러니까 대학생때,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가는 오태석이다, 라고 생각했다. 오태석이 누구? 놀랍게도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가 만든 연극을 본 적도 없지만, 덧붙여 그가 쓴 희곡을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연세대학교 학생들은 모두 그의 작품을 즐겨 불렀다. 불렀다. 앵? 그렇다면, 오태석은... 작곡가? 천만에!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자, 퀴즈 하나. 혹시 이 노래를 기억하시는지?

한 세기 지켜온 민족의 얼
진리와 자유 심어온 모습
뒤 안에 우뚝한 무악같이 
굳세고 슬기에 영원하여라
아하 연세 연세 내 사랑아 
형제 자매 내 사랑아
 
'관악산 바라보며 무악에 들러-'로 시작하는 연세대학교 교가를 모르는 사람은 많아도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 이 노래는 '연세찬가'이다. 그럼? 오태석은?  

연세찬가의 작사가이다. 그가 이 노래를 왜, 언제 작사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학창시절에 연극을 만들기 위한 돈을 좀 벌어보려고 응모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오태석이 연출한 연극을 많이 보았지만, 내게 가장 중요했던 작품은 둘이다. 하나는 91년에 공연한 <백구야 껑충나지마라>이고, 다른 하나는 95년에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오태석의 연극은 한국적인 전통 안에 있으면서 한국적인 전통의 바깥을 꿈꾸고, 드라마 속에서 있으면서 드라마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가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얻는 것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연극성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적임' 관한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는 전통극의 요소들을 통해서 초현실주의적 시공간을 보여준다. 

한국의 역사가 오태석 작품의 주요한 소재이면서 '내용'이라면 그가 연극 속에서 사용하는 춤과 노래, 말은 그의 연극을 이루는 '형식'이다. 그의 연극 속에서는 퍼포먼스가 드라마의 일부가 되고, 드라마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현대사를 춤과 소리로 풀어낸 <백구야 껑충나지마라>는 드라마가 퍼포먼스가 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어쩌면, 오태석이라는 연출가의 가장 위대한 점은 퍼포먼스의 재발견이 아닐까 싶다. 어린시절에 그가 연극 속에서 사용하는 굿, 탈춤, 막춤(?)과 같은 자유자재의 퍼포먼스들을 얼마나 부러워 했던가! 

95년에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한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의 연극성과 한국성이 절정에서 만난 작품이다. 앞으로 평생동안 이런 연극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그가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 속에서 원수지간의 두 가문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국의 현실로 치환되고, 연극 속에서 사용되는 한국적인 퍼포먼스들은 한국적인 것을 넘어서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한다. 어쩌면 바로 이 순간-그러니까 이것이 셰익스피어가 쓴 드라마인지 오태석이 연출한 퍼포먼스인지가 구분이 잘 안되는 순간-이 연출가가 궁극적으로 꿈꾸는 이상적인 지점이 아닐까.  

3. 두 개의 <햄릿>, 그리고 야구

2007년 이후 제가 정작 주목한 SK의 새로운 야구는 ‘뛰는 야구’도 뛰는 야구지만, ‘수비 야구’였습니다. 많은 야구전문가가 SK와 두산의 수비 야구를 높게 평가하는데요. 야구에서 가장 기본인 수비의 중요성이 SK와 두산 덕분에 드러났다는 생각입니다                        -<박동희의 베이스볼 2.0> 김성근 감독과의 인터뷰 중에서 -

연극 <햄릿> 포스터       

결국, 일요일날 눈빛극장 개관기념작인 이윤택 연출의 <햄릿>을 보고야 말았다. 이 연극을 굳이 일요일날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앞서, 그러니까 나흘 전에 본 극단 여행자의 햄릿이 너무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몇가지 이유를 대보자면, 우선 연극의 기본기들이 너무 엉성하다. 프로극단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주연배우의 발성이 불완전하며, 배우들끼리의 교감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고, 대사 전달은 부정확하다. 심지어 번역도 이상하다. 아무리 훌륭한 대본과 휘황찬란한 무대장치들을 등에 업어도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배우의 말 한마디, 아니 외마디 숨소리이다. 무대장치와 뽐나는 조명만을 보기 위해서라면 세 시간은 너무 길지 않은가!

두번째는 양정웅이 연출한 퍼포먼스가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겉돌고 있다는 것이다. 햄릿이 한국 사람이었다면, 굿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라는 연출가의 전제에는 동의하지만 '굿'이라는 퍼포먼스가 셰익스피어 연극이 가진 모든 연극성을 모두 드러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연극 안에서 드라마와 퍼포먼스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연출이 도입한 여러 형태의 '굿'이 약간의 볼거리를 제공할 뿐, 보편적이지도 그렇다고 극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단지, 연출가 자신의 낙인을 찍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이 연극의 나쁜 점은 퍼포먼스가 스토리 텔링과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토리 텔링과 감정이입, 역시 연극이 전달해야 하는 기본적이면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일종의 기본기!) 이 연극을 보고 아무런 감동도 어떠한 이해도 없었다면, 그건 연출가가 내용을 고려하지 않고 퍼포먼스만을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묵은 경구처럼 내용이 형식을 규정하는 법. 퍼포먼스를 결정할 때는 '형식'보다는 '내용'을 우선해야 하고, '함량'이나 '종류' 보다는 '동기'를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대체 왜 '형식'을 위해서 자의적으로 '내용'을 바꾸며, 왜 원작에도 없는 '굿'이 필요한 것인가? 단지 죽은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서? 글쎄, 만약 그게 전부라면, 퍼포먼스가 작품 내에서 서 있는 기반이 너무 미약한 것이고, 만약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가 연극 속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야 한다. 

"스토리 텔링과 감정이입을 방해하면서 까지 퍼포먼스를 도입해야 되는 이유가 대체 뭘까? "
연극을 보는 내내, 졸고 있는 옆 좌석의 외국인 관객을 보면서, 그 질문이 계속 나를 불편하게 했다. 

이윤택의 <햄릿>은 양정웅의 <햄릿>이 가진 모든 문제점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준다. 와, 단 나흘만에! 유레카! 아니, 현대적인 셰익스피어극을 어떻게 만들어 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고 해야 더 적합할 것 같다. 이윤택의 햄릿은 셰익스피어 극을 무대화할 때 생기는 기본적인 문제들을 꼼꼼하고 섬세하게 해결하였다. 아든판을 완역한 대본은 이전의 대본들-우리들이 흔히 읽는 대본들- 을 읽으면서 애매모호했던 부분들을 매끄럽게 처리하고 있다. 새로운 대본은 스토리 텔링을 매끄럽게 해주고, 캐릭터들을 보완해 주었고, 무엇보다도 번역투와 문어체 말투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배우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다. 드디어 진짜 '말'을 하는 배우들을 보게 된 것이다. 

'words, words, words (말, 말, 말)"-<햄릿>의 대사 중에서-

 셰익스피어 극을 무대화할 때 겪는 두번째 문제는 리액션에 관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햄릿이 긴 대사를 하고 있는 동안 상대 배우는 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건 관객들도 마찬가지 인데, 제 아무리 위대한 배우라 해도 16절지 한 바닥을 빼곡하게 채운 대사를 읊어댄다면  관객들은 졸게 마련이다. 이윤택은 이 문제를 굉장히 연극적인 방식으로 해결한다. 상대 배우들이 서로 약속된 동작과 몸짓으로 리액션을 대신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A가 말하면서 움직이면 B는 피하면서 넘어지고, C와 D는 넘어지는 B를 받는 식이다. 그들의 리액션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과장되어 있고 인위적이지만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마치 잘 짜여진 슬랩스틱 코미디 처럼. 그래서 더욱 아름답다. 이 연극을 보면, 굳이 한국적인 연극을 하기 위해서 굿이나 탈춤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퍼포먼스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윤택이 연출한 <햄릿>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평범한 행위들도 예술이 된다는 것.

무덤을 중심에 둔, 단순한 듯하면서도 효과적인 무대장치, 절묘한 장면전환, 꺼질 듯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올림픽 성화와도 같은 조명, 독특하고 극적인 음향들...... 이 연극에 대해서 칭찬하고 싶은 것들은 너무나도 많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내가 배우고 싶은 것들이기도 하다. 배운다고? 이제와서? 그런데, 대체, 뭘 위해서?

"The rest is silence. (나머지는 침묵일세)"-<햄릿>의 대사 중에서-

야구와 연극, 만약 이 둘이 공통점이 있다면, 둘 모두 드라마라는 것이다, 그것도 감동적인. 누구 말마따나 각본없는 드라마! 하지만 그것이 매번 있는 일은 아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본기에 충실해야 한다. 역전만루 홈런과 퍼펙트 게임이 멋진 일이긴 하지만, 탄탄한 수비와 성실한 주루 플레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야구가 드라마가 되지 않는 것처럼, 발성, 말하기, 스토리 텔링, 교감과 같은 기본기가 바탕이 되지 않는 연극은 아무리 화려한 무대 장치와 조명으로 치장해도 드라마가 되지 못한다, 절대로!

그리고 이것이 야구와 연극이 내게, 또는 이 둘을 좋아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공통의 가르침이다. 

by gosoo71 | 2009/11/09 23:32 | 영화와 연극과 나 | 트랙백 | 덧글(1)

교육(education)과 수련(training) 사이


utstein abbey 

2007
년에 배출된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100명이 조금 안 된다고 합니다. , , , -요즘도 외과, 산부인과 전문의가 우리보다 많은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와 몇 개 과를 제외하면 한 해에 나오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상위 몇 등 안에 든다고 하네요.


근데 이 많은 전문의들은 나와서 뭘 하게 될까요우선 이들의 선배들을 한 번 보도록 하죠. 저를 포함한 이전의 많은 전문의들도 그들처럼 전공의를 마치고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에 많은 숫자는 교수직을 하고 있거나, 그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 동기들만해도 대학병원에 있는 사람이 4명 중 3명입니다. 제 위의 선배 둘은 모두 대학병원에 있고, 그 위의 선배들도 6명중 4명이 대학병원을 포함한 수련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좀 더 위의 선배들을 살펴도 아마 이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 전문의를 따게 되는 이들도 과연 그들의 선배들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될까요아마도 백 명중 구 십 구 명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글쎄요.....' 정도. 그나마 한 명이라는 숫자도 '만약'을 배려한 것일 뿐, 별 의미는 없다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이들 '대부분'은 어떻게 될까요이 질문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입니다. 잘 모르겠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이고 불확실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들의 운명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들을 가르친 전문의들은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련을 받고, 시험을 보고, 전문의가 되고교수가 된 세대입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저만해도 그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전공의들과 (저를 포함한) 이들을 가르치는 전문의들은 응급의학과라는 무늬만 같을 뿐 과거의 환경도 앞으로의 운명도 전혀 다른 의사들인지도 모릅니다.

 

전공의들과 저,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은 바로 이, ‘수련이라는 과정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수련을 받는 입장이고, 다른 쪽은 수련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죠.

 

병원 내에 다른 모든 과들과 마찬가지로 응급의학과 또한 전공의들에게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 가 원하는 의사를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병원 내에서는 이를 전공의 교육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이전 것들을 의심하고 새로운 것을 교육(education)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전 것들을 반복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training)’하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전공의 과정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깨닫게 하는 것보다는 같은 것을 반복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권투 선수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놀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반복하듯이 말이죠.

 

제가 전공의로 응급실에서 일하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전공의들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다른 선배님들처럼요전공의들이, 또는 응급의학과를 하려는 사람들이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 제게 이것저것 질문을 합니다. 물론 다 답변을 하지는 못했습니다좋은 스승이란 좋은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으면서요. 그래서 이 자리가 비록 답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궁금했던 것들을, 또는 제 후배들이 궁금했으나 제가 대답할 수 없었던 것들을, 아니면 선배님들의 기억속에 희미하게 고민으로 남아 있던 것들을 같이 얘기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추신: 2009년 세응모 패널토의를 '시작하는 말'이다. 이전에 이글루에 포스팅했던 글을 첨삭하고 많이 줄였봤다. 

by gosoo71 | 2009/10/27 16:53 | 세응모 심포지움 | 트랙백 | 덧글(2)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일곱번째 주

1. 성장이라는 절벽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을꺼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J.D.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랭은 스물 여섯마리의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찔러서 정신과의사인 다이사트에게 의뢰되고, <캐리>의 주인공인 초능력자 캐리는 월경을 할 때마다 살인을 저지른다. 이들을 미치게 하고 살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장'이다. 그러니 '성장'은 항상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은근슬쩍 일어난다,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가 너무 오래 전에 '그것', 그러니까 성장, 을 경험했기 때문에 올챙이 시절의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성장은 갑자기, 훌쩍 일어난다. 방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큰 애가 십개월이 되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고, '예, 아니오, 엄마, 아빠' 밖에 모르던 작은 애가 게임에서 꼴찌한 아빠를 달래 주기 위해서 '아빠, 걱정마세요. 저만 믿으세요.'라고 위로한다. 잠깐동안 얘들이 진짜 걔들 맞을까를 생각한다. 대체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앞으로 놀랄 일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와 코피 터지게 주먹질을 할 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몰래 민망한 야동을 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은 상상조차, 사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더 심각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른바 사춘기와 '질풍노도'의 시기와 방황하는 청춘의 터널을 지나가야 하니까.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변하고, 또 갑자기 속을 알 수 없는 십대가 되고, 또 또 갑자기 반항하고 제멋대로인 이십대가 된다. 어쩌면 여자문제로 심가하게 고민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 그 놈의 '성장'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당사자가 모른다는 것이다, 뭘? 자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순수했던 일상의 신화가 깨진 알랭에게 성(性)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고, 캐리가 경험한 초경이라는 육체적 성장은 살인으로 얼룩진 핏빛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무 일없이 넘어가는데, 왜 이들에게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길! 과연 우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우리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없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니 우리 자신만 끔찍하고 갑작스러웠던 우리의 '성장'을 모르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주인공 홀필드의 말처럼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우리들을 절벽 앞에서 붙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의 '성장'도 언제든지 더 끔찍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단지 그 사실을 우리 자신만 모를뿐. 

성장의 절벽에서 추락하려는 다니엘 셈페레(<바람의 그림자>의 주인공)를 잡아 준 것은 '책', 그러니까 훌리안 까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물론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마술적 사실주의 풍의, 음, 환타스틱하고, 또 음, 미스테리어스한 성장소설이긴 하지만. (대체 뭔 말인지......) 쉽게 말해서, 여러가지 장르들에서 차용한 소설적 장치들과 바르셀로나라는 이국적인 풍경이 소설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지만 결국 성장소설이라는 골격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혹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인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그녀의 모든 것을 숭배하고, 결국엔 헤어졌던 것처럼,  다니엘 또한 연상의 여인 클라라를 사랑했지만 시련을 당하고, 헤어지고, 클라라의 문제로 아버지와 대립한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아니 우리가 성장'이라는 절벽에서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았던 것처럼, 다니엘도 자신을 성장의 절벽 앞에서 붙잡아 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책이기도 한 훌리안 까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이다. 

어떤 학생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많은 이름들이 합해지고 나뉘어지고, 교차되는 것들을 정리하여 서평을 썼다. 신선한 생각이다. 왜나하면 <바람의 그림자>는 '성장'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이름들의, 또는 인물들의 합체, 분열, 교차를, 한마디로 하면, '변신'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과 '변신', 이 둘은 둘이면서 결국 하나이다. 왜?

누구나 '성장'을 통해서 '변신'하니까.

2. 내년에는 뭐하지?
저번 주가 너무 바빠서 이번 주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책도 다 읽는데 실패했고, 수업 때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았다. 이번 주 두번째 시간은 좀 횡설수설한 듯한 느낌이다. 본래 취지는 이 번 학기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것이었는데, 토론을 활발하게 만들지 못했다. 

학생들의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시간에 수업을 하면서, 이 번 학기 수업에서 학생들의 토론이 별로 활발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것이 단지 여러 학년이 섞여 있고 사람이 많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토론의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햄릿>이라는 작품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으면 '복수'의 의미를 주제로 잡고, <이방인>은 '정신분석'과 '까뮈'라는 인물로, <페스트>는 '의사의 윤리'와 '페스트의 의미'로, <당신들의 천국>은 '60년대 한국 작가'로, <바람의 그림자>는 '추리소설'과 '성장'으로 작품에서 토론의 주제를 잡아서 진행했으면 토론이 좀 더 활발해졌을 것이다.
학생들의 글이나 직접적인 의견을 반영해서 토론의 주제를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토론 또는 잡담은 많이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자신의 주장을 좀 더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내년에 참고해서 수업을 준비해야 겠다. 

내년에는 좀 더 현대적인 작품들로 수업을 준비할 생각이다. 다음은 후보에 오른 책들이다.

첫번째는 마종기 시인의 시집이다. 

  
두번째는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이다. 



세번째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네번째는 김훈의 <강산무진>이다.


다섯번째는 폴오스터의 <공중곡예사>이다. 
 

내년에 읽을 책들을 소개해본다. 떨린다. 아마도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투수를 예고하는 감독의 심정이 이럴 것 같다. 한국 시리즈가 결국 7차전까지 왔다. 역대 6번째란다. 내일 선발 투수는 구톰슨(기아)과 글로버(SK). 타이거스와 와이번스의 대결이 진짜 용쟁호투이면서 용호상박이 돼가고 있다. 막강한 SK를 상대로 한 수 아래라고 여겨졌던 기아가 정말 잘 싸우고 있다. 오늘도 아쉽게 졌다. 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이기리라. 혹...... 그 다음은 말하지 않으리.

호랑이에게 V10의 행운이 함께 하기를.
 
제발! 

by gosoo71 | 2009/10/22 16:29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0)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여섯번째 주

1. 데자뷔, 1960년대 작가와 91학번
질문 1. 태어나서 처음 읽었던 책은?
대답 1. 글쎄, 너무 먼 옛날이라서...... 아마도 딴 아기들처럼 그림동화를 읽지 않았을까?
질문 2. 국민학교 , 중학교,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중에 기억에 남는 책은?
대답2. 이것도 역시 가물가물.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읽었던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은 방학 때마다 외가에서 읽었던 그림 성경책(이건 거의 백번 넘게 읽었던 것 같다)과 중학교 때 읽었던 '삼국지'이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성경'과 '삼국지'란다. 그렇고 보니, 나도 마찬가지네.
질문 3. 대학에 와서 처음 읽은 책은?
대답 3.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읽었던 책은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을 시작으로 <회색인>,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었던 것 같고, 순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김승옥과 이청준, 박상륭, 서정인의 소설들을 읽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사실 책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연극이 끝나면 쓸쓸해서 백양로의 낙엽들을 발로 차다가 '슬기샘'에서 한 권 사고, 시험이 끝나면 술마시는 메모를 확인하러 독다방의 메모지들을 확인하다가-이 시기는 비퍼가 등장하면서 끝이 난다-  '알서림'에서 한 권 사고, 생일날에는 '오늘의 책' 으로 포장된 시집을 누군가로부터 한 권 받고, 드물게 맨정신으로 집에 가는 날에는 지하철 역 입구의 '홍익서점'에서 한 권 사고. 닥치는 대로, 서점에 꽂혀 있는 대로, 선배들이 권해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읽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대학원 수업중에 경험한 일종의 '데자뷔'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렇게 무작위로 읽었던 책들이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91년도에 읽은 작가들은 모두 196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들이었다. 그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91년도에 읽은 작가들을 2007년도에 60년대 소설을 읽는 대학원 수업에서 모두 다시 읽었다. 비록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 때의 느낌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일종의 데자뷔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책꽂이를 둘러 보니 한국 문학사와 관련된 책이 없다. 그래도 명색이 국문학과 전공(부전공인가?)자 인데이래서야 쓰나, 하는 생각에 고른 책이 바로 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이다. 저자는 김소월, 김동리, 서정주가 활동했던 1930년대를 한국문학 '제 1의 부흥기'로, 1960년대를 '제2의 부흥기'로 규정하고 있다. 1960년대는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과 같은 소설가들의 시대였으면서 동시에 김수영, 신동엽, 마종기와 같은 시인들의 시대이면서, 문학과 지성사의 창단멤버들인 김현, 김치수, 김병익과 같은 쟁쟁한 평론가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이렇게 쟁쟁한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등장했던 것일까? 좀 더 넓게 보면1960년대의 한국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한글교육과 4.19혁명, 1960년대 작가들은 기술적으로나(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정신적으로(민주주의의 영향과 4.19 혁명) 이전 세대들에 비해서 성숙해졌다. 일본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李想과 김동인의 딜레마를 이들은 더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 순수문학의 양대 산맥인 문지와 창비의 시작이 1960년대라는 사실은 그리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러니 신입생 때 읽었던 작가들이 대부분 60년대 작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셈이다. 이제 먼 훗날 나는, 또는 내세대의 문청(문학청년을 줄인말, 근데 '멍청'과도 발음이 비슷하다)들은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에 최인훈과 김승옥과 이청준의 소설들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서, 또는 김수영과 신동엽과 마종기의 시가 실려있는 것을 보면서 두번째 데자뷔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이들의 소설들을 처음 읽었던 순간들을 그리워 하겠지?   

2. '본다'에서 '보인다'까지



3. 對話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도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이번 주는 <당신들의 천국>이다. 이청준이 나의 석사학위논문이었고 학생들에게 읽힌 글이 내 논문의 서론이어서 이번주는 별로 준비할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신들의 천국>이 정치적인 알레고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글을 써왔다. 나 또한 그러한 견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작가도 단지 한 가지 사실만을 말하기 위해서 알레고리라는 장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순간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소설가들이 또는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동의한다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이 갖는 가치는 단지 1970년대 정치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에 그치지 않는다.

김현의 적절한 지적처럼, 이 작품을 통해서 통치자의 윤리와 철학에 대한 통찰을 읽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이 의사-환자, 지배자-피지배자, 정상-환자, 육지 사람-섬 사람의 대립을 좀 더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어서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대신 마종기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읽었다.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와 <이슬의 눈>을 읽었는데, 첫번째 시집이 더 좋다. 이 시집의 시중에서 '戀歌 9'과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 3.對話'를 수업 시간에 읽었다. 마종기 시인의 시들은 이민자의 삶과 의사의 삶 사이에서 방황한다. 해부학 교실에서 사랑을 노래하고('戀歌 9'),  강의실에서 생명을 떠올리고('第 3講義室에서'), 정신과 병동에서 죽음과 계절을  연결시키고(精神科 病棟),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의 친구들과 한국말과 한국의 골목골목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그가 쓴 시들의 행간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쓸쓸하다.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그의 나라가 보이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은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물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다. 아들의 말처럼 그 나라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멀어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보이기를 바라니까. 달리말하면, 그는 '본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인다'는 현실로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멀어서 안보이는 나라가 어찌 등불을 든다고 보이겠는가? 등불은 '본다'를 '보인다'로 탈바꿈시키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불과할 뿐.

등불을 드는 순간! 환하게 그의 눈앞에서, 아니 마음 속에서, 또는 희미한 기억속에서 그의 나라가 나타난다, 아니 나타날 것이다. 나타나라, 나타나라, 나타나라...... 

누구에게나 '보이기' 위해서 '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잊지말것, 등불을 꼭 준비하시길!

by gosoo71 | 2009/10/16 11:39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3)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