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education)과 수련(training) 사이


utstein abbey 

2007
년에 배출된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100명이 조금 안 된다고 합니다. , , , -요즘도 외과, 산부인과 전문의가 우리보다 많은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와 몇 개 과를 제외하면 한 해에 나오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수가 상위 몇 등 안에 든다고 하네요.


근데 이 많은 전문의들은 나와서 뭘 하게 될까요우선 이들의 선배들을 한 번 보도록 하죠. 저를 포함한 이전의 많은 전문의들도 그들처럼 전공의를 마치고 어디선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중에 많은 숫자는 교수직을 하고 있거나, 그것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 동기들만해도 대학병원에 있는 사람이 4명 중 3명입니다. 제 위의 선배 둘은 모두 대학병원에 있고, 그 위의 선배들도 6명중 4명이 대학병원을 포함한 수련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좀 더 위의 선배들을 살펴도 아마 이 비율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 전문의를 따게 되는 이들도 과연 그들의 선배들과 똑같은 길을 걷게 될까요아마도 백 명중 구 십 구 명은 '아니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나머지 한 명은 '글쎄요.....' 정도. 그나마 한 명이라는 숫자도 '만약'을 배려한 것일 뿐, 별 의미는 없다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이들 '대부분'은 어떻게 될까요이 질문에 대한 답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데, 그건 '잘 모르겠다'입니다. 잘 모르겠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이고 불확실하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들의 운명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이들의 운명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이들을 가르친 전문의들은 교직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이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련을 받고, 시험을 보고, 전문의가 되고교수가 된 세대입니다. 그렇게 멀리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저만해도 그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수련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전공의들과 (저를 포함한) 이들을 가르치는 전문의들은 응급의학과라는 무늬만 같을 뿐 과거의 환경도 앞으로의 운명도 전혀 다른 의사들인지도 모릅니다.

 

전공의들과 저,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은 바로 이, ‘수련이라는 과정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 쪽은 수련을 받는 입장이고, 다른 쪽은 수련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죠.

 

병원 내에 다른 모든 과들과 마찬가지로 응급의학과 또한 전공의들에게 수많은 반복을 통해서 가 원하는 의사를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병원 내에서는 이를 전공의 교육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이전 것들을 의심하고 새로운 것을 교육(education)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이전 것들을 반복하고 똑같은 방식으로 훈련’(training)’하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전공의 과정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깨닫게 하는 것보다는 같은 것을 반복하고 익숙하게 만드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권투 선수가 주먹을 휘두르고 발을 놀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고 반복하듯이 말이죠.

 

제가 전공의로 응급실에서 일하던 것이 바로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전공의들을 가르쳐야 하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다른 선배님들처럼요전공의들이, 또는 응급의학과를 하려는 사람들이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 제게 이것저것 질문을 합니다. 물론 다 답변을 하지는 못했습니다좋은 스승이란 좋은 답을 내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위안으로 삼으면서요. 그래서 이 자리가 비록 답을 내지는 못하더라도, 제가 궁금했던 것들을, 또는 제 후배들이 궁금했으나 제가 대답할 수 없었던 것들을, 아니면 선배님들의 기억속에 희미하게 고민으로 남아 있던 것들을 같이 얘기해보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추신: 2009년 세응모 패널토의를 '시작하는 말'이다. 이전에 이글루에 포스팅했던 글을 첨삭하고 많이 줄였봤다. 

by gosoo71 | 2009/10/27 16:53 | 세응모 심포지움 | 트랙백 | 덧글(2)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일곱번째 주

1. 성장이라는 절벽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을꺼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거야. 애들이란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야.
-J.D.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 중에서-

<에쿠우스>의 주인공 알랭은 스물 여섯마리의 말의 눈을 쇠꼬챙이로 찔러서 정신과의사인 다이사트에게 의뢰되고, <캐리>의 주인공인 초능력자 캐리는 월경을 할 때마다 살인을 저지른다. 이들을 미치게 하고 살인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성장'이다. 그러니 '성장'은 항상 아무도 모르게, 천천히, 은근슬쩍 일어난다, 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가 너무 오래 전에 '그것', 그러니까 성장, 을 경험했기 때문에 올챙이 시절의 기억을 못하는 것이다. 성장은 갑자기, 훌쩍 일어난다. 방바닥을 엉금엉금 기어다니던 큰 애가 십개월이 되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고, '예, 아니오, 엄마, 아빠' 밖에 모르던 작은 애가 게임에서 꼴찌한 아빠를 달래 주기 위해서 '아빠, 걱정마세요. 저만 믿으세요.'라고 위로한다. 잠깐동안 얘들이 진짜 걔들 맞을까를 생각한다. 대체 언제 저렇게 커버렸을까? 

앞으로 놀랄 일은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학교에서 친구와 코피 터지게 주먹질을 할 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몰래 민망한 야동을 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지금은 상상조차, 사실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더 심각한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른바 사춘기와 '질풍노도'의 시기와 방황하는 청춘의 터널을 지나가야 하니까. 갑자기 아이들의 목소리가 변하고, 또 갑자기 속을 알 수 없는 십대가 되고, 또 또 갑자기 반항하고 제멋대로인 이십대가 된다. 어쩌면 여자문제로 심가하게 고민할 지도 모른다. 이것이 다 그 놈의 '성장'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당사자가 모른다는 것이다, 뭘? 자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그래서 순수했던 일상의 신화가 깨진 알랭에게 성(性)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이었고, 캐리가 경험한 초경이라는 육체적 성장은 살인으로 얼룩진 핏빛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아무 일없이 넘어가는데, 왜 이들에게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길! 과연 우리한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일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우리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없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니 우리 자신만 끔찍하고 갑작스러웠던 우리의 '성장'을 모르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도 아니라면, 누군가가 <호밀밭의 파수꾼>에 등장하는 주인공 홀필드의 말처럼 앞 뒤 생각없이 마구 달리는 우리들을 절벽 앞에서 붙잡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우리의 '성장'도 언제든지 더 끔찍해졌을 수도 있었으리라. 단지 그 사실을 우리 자신만 모를뿐. 

성장의 절벽에서 추락하려는 다니엘 셈페레(<바람의 그림자>의 주인공)를 잡아 준 것은 '책', 그러니까 훌리안 까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였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성장소설의 냄새를 풍긴다. 물론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라 마술적 사실주의 풍의, 음, 환타스틱하고, 또 음, 미스테리어스한 성장소설이긴 하지만. (대체 뭔 말인지......) 쉽게 말해서, 여러가지 장르들에서 차용한 소설적 장치들과 바르셀로나라는 이국적인 풍경이 소설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지만 결국 성장소설이라는 골격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내가 혹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여인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무언가를 배우고, 그녀의 모든 것을 숭배하고, 결국엔 헤어졌던 것처럼,  다니엘 또한 연상의 여인 클라라를 사랑했지만 시련을 당하고, 헤어지고, 클라라의 문제로 아버지와 대립한다. 그리고 하나 더!  내가, 아니 우리가 성장'이라는 절벽에서 자신을 지켜줄 누군가를 절실하게 찾았던 것처럼, 다니엘도 자신을 성장의 절벽 앞에서 붙잡아 줄 무언가를 찾는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책 속에 등장하는 책이기도 한 훌리안 까락스가 쓴 <바람의 그림자>이다. 

어떤 학생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많은 이름들이 합해지고 나뉘어지고, 교차되는 것들을 정리하여 서평을 썼다. 신선한 생각이다. 왜나하면 <바람의 그림자>는 '성장'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이름들의, 또는 인물들의 합체, 분열, 교차를, 한마디로 하면, '변신'을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장'과 '변신', 이 둘은 둘이면서 결국 하나이다. 왜?

누구나 '성장'을 통해서 '변신'하니까.

2. 내년에는 뭐하지?
저번 주가 너무 바빠서 이번 주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책도 다 읽는데 실패했고, 수업 때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를 정하지 않았다. 이번 주 두번째 시간은 좀 횡설수설한 듯한 느낌이다. 본래 취지는 이 번 학기 수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것이었는데, 토론을 활발하게 만들지 못했다. 

학생들의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시간에 수업을 하면서, 이 번 학기 수업에서 학생들의 토론이 별로 활발하지 않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전에는 그것이 단지 여러 학년이 섞여 있고 사람이 많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건 토론의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햄릿>이라는 작품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으면 '복수'의 의미를 주제로 잡고, <이방인>은 '정신분석'과 '까뮈'라는 인물로, <페스트>는 '의사의 윤리'와 '페스트의 의미'로, <당신들의 천국>은 '60년대 한국 작가'로, <바람의 그림자>는 '추리소설'과 '성장'으로 작품에서 토론의 주제를 잡아서 진행했으면 토론이 좀 더 활발해졌을 것이다.
학생들의 글이나 직접적인 의견을 반영해서 토론의 주제를 잡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 토론 또는 잡담은 많이 생각하는데 도움을 준다. 자신의 주장을 좀 더 객관화시킬 수 있다. 내년에 참고해서 수업을 준비해야 겠다. 

내년에는 좀 더 현대적인 작품들로 수업을 준비할 생각이다. 다음은 후보에 오른 책들이다.

첫번째는 마종기 시인의 시집이다. 

  
두번째는 피터 쉐퍼의 <에쿠우스>이다. 



세번째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네번째는 김훈의 <강산무진>이다.


다섯번째는 폴오스터의 <공중곡예사>이다. 
 

내년에 읽을 책들을 소개해본다. 떨린다. 아마도 한국시리즈 7차전 선발투수를 예고하는 감독의 심정이 이럴 것 같다. 한국 시리즈가 결국 7차전까지 왔다. 역대 6번째란다. 내일 선발 투수는 구톰슨(기아)과 글로버(SK). 타이거스와 와이번스의 대결이 진짜 용쟁호투이면서 용호상박이 돼가고 있다. 막강한 SK를 상대로 한 수 아래라고 여겨졌던 기아가 정말 잘 싸우고 있다. 오늘도 아쉽게 졌다. 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이기리라. 혹...... 그 다음은 말하지 않으리.

호랑이에게 V10의 행운이 함께 하기를.
 
제발! 

by gosoo71 | 2009/10/22 16:29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0)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여섯번째 주

1. 데자뷔, 1960년대 작가와 91학번
질문 1. 태어나서 처음 읽었던 책은?
대답 1. 글쎄, 너무 먼 옛날이라서...... 아마도 딴 아기들처럼 그림동화를 읽지 않았을까?
질문 2. 국민학교 , 중학교,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 중에 기억에 남는 책은?
대답2. 이것도 역시 가물가물.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 읽었던 책 중에 기억나는 것은 방학 때마다 외가에서 읽었던 그림 성경책(이건 거의 백번 넘게 읽었던 것 같다)과 중학교 때 읽었던 '삼국지'이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성경'과 '삼국지'란다. 그렇고 보니, 나도 마찬가지네.
질문 3. 대학에 와서 처음 읽은 책은?
대답 3.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읽었던 책은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최인훈의 <광장>을 시작으로 <회색인>,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읽었던 것 같고, 순서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김승옥과 이청준, 박상륭, 서정인의 소설들을 읽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어서 사실 책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연극이 끝나면 쓸쓸해서 백양로의 낙엽들을 발로 차다가 '슬기샘'에서 한 권 사고, 시험이 끝나면 술마시는 메모를 확인하러 독다방의 메모지들을 확인하다가-이 시기는 비퍼가 등장하면서 끝이 난다-  '알서림'에서 한 권 사고, 생일날에는 '오늘의 책' 으로 포장된 시집을 누군가로부터 한 권 받고, 드물게 맨정신으로 집에 가는 날에는 지하철 역 입구의 '홍익서점'에서 한 권 사고. 닥치는 대로, 서점에 꽂혀 있는 대로, 선배들이 권해주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읽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대학원 수업중에 경험한 일종의 '데자뷔'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렇게 무작위로 읽었던 책들이 나름대로의 규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91년도에 읽은 작가들은 모두 196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들이었다. 그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91년도에 읽은 작가들을 2007년도에 60년대 소설을 읽는 대학원 수업에서 모두 다시 읽었다. 비록 이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그 때의 느낌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일종의 데자뷔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책꽂이를 둘러 보니 한국 문학사와 관련된 책이 없다. 그래도 명색이 국문학과 전공(부전공인가?)자 인데이래서야 쓰나, 하는 생각에 고른 책이 바로 장석주의 <나는 문학이다>이다. 저자는 김소월, 김동리, 서정주가 활동했던 1930년대를 한국문학 '제 1의 부흥기'로, 1960년대를 '제2의 부흥기'로 규정하고 있다. 1960년대는 최인훈, 김승옥, 이청준과 같은 소설가들의 시대였으면서 동시에 김수영, 신동엽, 마종기와 같은 시인들의 시대이면서, 문학과 지성사의 창단멤버들인 김현, 김치수, 김병익과 같은 쟁쟁한 평론가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이 시기에 이렇게 쟁쟁한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등장했던 것일까? 좀 더 넓게 보면1960년대의 한국인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한글교육과 4.19혁명, 1960년대 작가들은 기술적으로나(일본어가 아닌 한국어로), 정신적으로(민주주의의 영향과 4.19 혁명) 이전 세대들에 비해서 성숙해졌다. 일본어로 생각하고 한국어로 글을 써야 하는 李想과 김동인의 딜레마를 이들은 더이상 겪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 순수문학의 양대 산맥인 문지와 창비의 시작이 1960년대라는 사실은 그리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다.   

그러니 신입생 때 읽었던 작가들이 대부분 60년대 작가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던 셈이다. 이제 먼 훗날 나는, 또는 내세대의 문청(문학청년을 줄인말, 근데 '멍청'과도 발음이 비슷하다)들은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에 최인훈과 김승옥과 이청준의 소설들이 실려 있는 것을 보면서, 또는 김수영과 신동엽과 마종기의 시가 실려있는 것을 보면서 두번째 데자뷔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도 지금처럼 이들의 소설들을 처음 읽었던 순간들을 그리워 하겠지?   

2. '본다'에서 '보인다'까지



3. 對話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 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 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 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아빠는 그래도 어두웠잖아?

등불이 자꾸 꺼졌지.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아빠, 갔다가 꼭 돌아와요, 아빠가 찾던 것은 아마 없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꼭 찾아 보세요. 그래서 아빠, 더 이상 헤매지 마세요.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 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도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문학과 지성사) 중에서-

이번 주는 <당신들의 천국>이다. 이청준이 나의 석사학위논문이었고 학생들에게 읽힌 글이 내 논문의 서론이어서 이번주는 별로 준비할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신들의 천국>이 정치적인 알레고리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글을 써왔다. 나 또한 그러한 견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작가도 단지 한 가지 사실만을 말하기 위해서 알레고리라는 장치를 사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이라는 것이 순간에서 영원한 것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소설가들이 또는 시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이 단편적인 사실이 아니라 보편적인 진실이라는 사실에 한 번 더 동의한다면,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소설이 갖는 가치는 단지 1970년대 정치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에 그치지 않는다.

김현의 적절한 지적처럼, 이 작품을 통해서 통치자의 윤리와 철학에 대한 통찰을 읽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이 의사-환자, 지배자-피지배자, 정상-환자, 육지 사람-섬 사람의 대립을 좀 더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이 그리 긴 시간은 아니어서 <당신들의 천국>을 읽는 대신 마종기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읽었다.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와 <이슬의 눈>을 읽었는데, 첫번째 시집이 더 좋다. 이 시집의 시중에서 '戀歌 9'과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 3.對話'를 수업 시간에 읽었다. 마종기 시인의 시들은 이민자의 삶과 의사의 삶 사이에서 방황한다. 해부학 교실에서 사랑을 노래하고('戀歌 9'),  강의실에서 생명을 떠올리고('第 3講義室에서'), 정신과 병동에서 죽음과 계절을  연결시키고(精神科 病棟), 한국이 아닌 곳에서 한국의 친구들과 한국말과 한국의 골목골목을 끊임없이 그리워한다. 그가 쓴 시들의 행간은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쓸쓸하다. 

아빠가 사랑하는 나라가 보여?
등불이 있으니까
그래도 멀어서 안보이는데?
등불이 있으니까

왜냐하면 그의 나라가 보이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그의 소망은 '안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물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다. 아들의 말처럼 그 나라는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멀어서 보이지 않는 나라를 보려고 하는 것일까? 보이기를 바라니까. 달리말하면, 그는 '본다'는 자신의 행위를 '보인다'는 현실로 믿고 싶어하는 것이다. 멀어서 안보이는 나라가 어찌 등불을 든다고 보이겠는가? 등불은 '본다'를 '보인다'로 탈바꿈시키는 일종의 자기 최면에 불과할 뿐.

등불을 드는 순간! 환하게 그의 눈앞에서, 아니 마음 속에서, 또는 희미한 기억속에서 그의 나라가 나타난다, 아니 나타날 것이다. 나타나라, 나타나라, 나타나라...... 

누구에게나 '보이기' 위해서 '봐야' 하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잊지말것, 등불을 꼭 준비하시길!

by gosoo71 | 2009/10/16 11:39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3)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다섯번째 주

1. 도서관 밖으로 수업하라
수업을 하고 나면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가르친 사람이다. 이건 어떤 수업이나 마찬가진가 보다. 달리 말하면, 이 말은 무언가를 많이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학기에 읽기로 한 네 권의 책, 한권이 늘어서 다섯권이 되었지만, 중 가장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한 까뮈의 책들이 드디어 끝났다. 

너무 고전위주로 짜여져 있다는 준호의 지적처럼, 나역시도, 피에르 바야르가 말하는 '집단도서관'-모든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말하는 추천도서의 총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만으로 커리큘럼을 짠 것 같아 약간 찔린다. 특히 까뮈의 책들은 더더욱! 왜냐하면 나머지 세 작가들과 비교해서 까뮈는 나와 별로 인연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연극을 좋아해서 선택했고, 이청준은 이 작가를 주제로 논문을 썼기 때문에 선택했고, 사폰은 재미있게 읽어서 선택했지만, 까뮈는? 까뮈는 재미있게 읽지도 공부를 하지도 않았으면서도 선택했다. 왜? 집단도서관의 책이니까!

근데, 이상한 것은, 이전까지는 지루하다고 생각해서 읽는 것을 차일 피일 미뤘는데, 막상 까뮈가 끝나고 나니 좀 아쉬운 생각이 든다. 아마도 수업을 위해서 사놓고 안읽은 책이 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페스트>를 내년 수업에 넣을 지 어쩔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겠다. 근데, 아마도 넣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이방인>과 <페스트>가 그리 재미있는 소설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소득도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해서 잘 모르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알제와 오랑, 폐결핵, 까뮈가 갖고 있었던 정치적, 또는 사상적인 쟁점 등등......



<까뮈 1, 2-부조리와 반항의 정신->(올리비에 토드, 책세상), <카뮈>(데이빗 제인메로위츠, 김영사),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이방인>, <페스트>, <정의의사람들. 계엄령>, <작가수첩 II> (까뮈, 책세상). 이 책들이 올해에 까뮈를 수업하기 위해서 읽은 책들이다. 물론 다읽은 책도 있고, 그렇지 못한 책도 있다. 이중에서 가장 가격대비 성능이 좋은 책은 김영사에서 나온 책이다. '하룻밤의 지식여행'시리즈로 나온 <카뮈>는 생긴 것과는 달리 굉장히 알차다. 그림과 함께 카뮈의 생애와 주요작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출근 길 지하철에서 까뮈의 희곡 <정의의사람들>을 읽었다. <페스트>에서 파늘루 신부는 오통판사의 아들이 페스트로 죽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페스트가 신의 의지라는 기존에 갖고 있던 신념이 흔들린다. 까뮈는 다른 작품에서도 절대적인 '선'을 상징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등장시키는 경향이 있다. <정의의 사람들>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테러리스트들의 이야기인데, 이 작품에서도 낭만적인 테러리스트 깔리아예프가 대공의 아이들 때문에 일차 테러를 실패하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조직의 스테반은 깔리아예프의 이런 나약함을 비난한다. 지금은 투옥된 깔리아예프가 자신이 죽인 대공의 부인을 만나고 있는 중이다. 어떻게 될까? 과연 대공비는 낭만적 테러리스트 깔리아예프를 설득하는데 성공할것인가? 짜잔!

결말은 내일 퇴근길 지하철에서

To be continued...... 

2. 덫 혹은 독
이번 주는조금 다른 방식을 택했다. 이전에는 수업 전체와 관련된 글을 첫 시간에 읽고, 두번째 시간에 학생이 쓴 글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발표를 먼저하고 '글'을 나중에 읽었다. 왜냐하면 읽어야 하는 '글'에 우리가 토론할 내용이 너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범답안을 읽고 문제를 풀수는 없잖아? 물론 책읽고 생각하는 것에 정답이라는 것이 없기는 하지만.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에 실린 <페스트>에 관한 서평을 읽었다. 저자는 자신의 글속에서 우리가 토론했던 내용의 대부분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이고 쉽게 설명해놓았다. 사실 이 책은 내가 직접 구입한 책이 아니라 <설득의 논리학>을 살때 사은품으로 받은 책이다. <설득의 논리학>과 마찬가지로 이 책 역시 쉽고 정리가 잘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보다는 이 책이 설명하고 있는 책들을 직접 읽고 혼자서 생각해보는 것이 백 배, 천 배 낫다. 나는 영화, 그림, 철학 등등을 쉽게 설명해주다는 책들을 믿지도 읽지도 않는다. 그들의 의견에 불만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들에게 내 즐거움-어려운 문제들을 가끔씩 생각해보면서 어쩌다가 한 번 기발한 결론에 도달하는-을 빼앗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여 언제나 그렇듯 너무 쉬운 길은 덫이나 독(毒)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도 김용규의 모범 답안을 한 번 보자.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페스트가 더 넓은 의미로 모든 인간의 삶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 곧 죽음에 갇혀 삶과 세계에 대해 어떤 희망이나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살아야만 하는 부조리를 뜻한다고 해석하지요.(189쪽) 

이러한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또는 간단히 '존재의 무의미성'이 바로 부조리라는 말이 가진 진정한 뜻입니다. 그래서 <페스트>를 읽을 때 종종 '페스트'라는 말 대신 '부조리' 또는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이나 '존재의 무의미성'으로 바꾸어 읽으면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숨은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지요.(191쪽)

어떤 프랑스어 사전에는 '베스트셀러'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소설 <페스트>를 예로 든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이 소설이 프랑스어 판만 500만부 팔릴 정도로 대중성을 갖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소설의 이야기가 별로 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이 지적한 까뮈가 작가로서 '스토리 텔링'에 능수능란한 작가가 아니라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한다. 까뮈는 이 작품을 통해서 '페스트'라는 질병이 오랑이라는 도시에서 만들어 내는 변화무쌍하고 극적인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아마도 까뮈는 페스트가 만들어 내는 오랑의 '이야기'보다는 페스트라는 질병이 오랑의 사람들-주인공 리외와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깨닫게 만든 '통찰'의 내용과 그러한 과정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그리고 그 통찰의 내용은 김용규가 지적한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 페스트라는 질병이 '삶과 세계의 무의미성' 또는 '존재의 무의미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

까뮈는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형벌을 '무용하고 희망없는 노동'이라고 하였다. 리외는, 또는 많은 의사들은 이런 형벌에 늘 노출되어 있다.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 말기 암 환자들에게 삶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99퍼센트 화상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수술이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이들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설명을 일상적으로  한다. 일퍼센트도 안되는 확률을 기대하고, 또는 그런 기대도 없이 그들의 삶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해야만 하는 우리들 모두가 알고 보면 리외다. 리외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우리 가까이에, 아니 우리 내면에, 그 내면의 저 깊은 밑바닥, 절망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무의식 속에, 그것도 아니라면, 삶을 절망해야 하는 일퍼센트의 아이러니에 속에 있다. 마치 페스트가 그러한 것처럼.

페스트 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년 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10쪽, <페스트>, 까뮈, 책세상)


하지만 어쩌면 '무용하고 희망없는 노동'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리외가 아니라 페스트로 죽어가는 모든 이들이며, 우리가 아니라 우리가 치료해야 하는 이들일 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잠깐, 진짜,  아주 잠깐 했다.   
  

by gosoo71 | 2009/10/08 15:16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1)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네번째 주

1. 너의 죄를 사하노라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반이 지났다. 이제 겨우 <햄릿>과 <이방인>을 읽었을 뿐인데...... 학생들이 책을 읽고 토론을 하기 위해서는, 문학전공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의과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400쪽 가량의 책을 읽는데는 한 2주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게다가 글까지 써야 한다면, 사실 2주도 빠듯하다. 그래서 학생들의 숙제를 줄여주기로 했다. 열명씩 나누어서 격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방식으로! 

오늘 첫 시간에 읽은 글은 피에르 바야르가 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의 <프롤로그>이다. 이전에 이글루에 리뷰를 올린 적이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이런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이 읽었을 법한 책을 본인이 읽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졌던 사람, 남들이 재미있고 유익하다고 하는 책을 읽었으나 책장을 덮는 순간부터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사람, 심지어 책을 전혀 읽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근데, 책을 어차피 읽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책'을 권해줄 필요가 있을까 싶긴하다.



내 경험을 얘기하자면, 청년의사에서 '문학과 의학' 칼럼을 쓰던 시절 <닥터 지바고>를, 에릭시걸의 <닥터스>를, <닥터노먼베쑨>을, 로빈 쿡의 스릴러물 전부를 읽지 않은 것 때문에 약간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닥터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책들은 아직도 읽지 않았다) 단지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읽은 척 한 것 때문에 더욱, 게다가 그 책들을 읽어보지도 않고 단칼에 '지겨워', '삼류야', '수준이하야' 와 같은 말들을 남발한 경험때문에 더더욱. 심지어 그런 책들을 '문학과 의학'에 써보면 어떨까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꽤 긴 이유를 들어서 우아하게 거절했던 경험 때문에 더더더욱 그렇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남들로 부터 주워 듣기만 한 지식으로- 예를 들면 니체와 카프카의 책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 같다- 상대방과 그 책의 내용에 대해서 토론을 한 적도 있다. 

사실 알고보면 누구에게나 독서라는 행위는 즐거운 행위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행위이다. 피에르 바야르는 일반인들이 독서에 대해서 갖는 두려움이 세가지 원인을 갖는다고 한다. 독서의 의무, 정독의 의무, 책에 관한 담론에 참여해야 하는, 또는 책의 내용을 남들 앞에서 제대로 얘기해야 한다는 의무. 물론 이 책은 이런 두려움들을 없애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인지 이 책을 읽고나면 책읽기와 관련된  나의 크고 작은 죄(?)들이 죄사함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저자의 주장을 한마디로 하면, 책 안 읽었다고 기죽지 말라는 것이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 책을 읽는, 또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 조차도 너와 비슷한 종류의 죄를 지으니 괜찮아, 라고 저자는 우리를 다독거린다.   

그가 제시하는 대처요령을 한번보자. 부끄러워하지 말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이건 좀 너무하다) 그럼, 모두가 똑같으니 책읽지 말고 아는 척하자? 언뜻 생각하면, 이런 식의 결론이 나올 법한데, 저자의 메시지는 그런 류의 권고가 아니다. 그의 메시지는 평서문이 아닌 의문문이다. 책을 읽은 것과 책을 읽지 않은 것이 별 차이가 없는데, 책을 읽는다는 것, 그러니까 독서란 게 대체 뭐일까? 이게 저자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책 속에 없다. 어쩌면 책을 읽은 이들의 희미한 죄의식(?) 속에 있다, 아니 있을 것이다.

2. 포스트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울린다>라는 소설 속에는 포스트맨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 속에는 프랭크라는 떠돌이와 간이 식당 주인아저씨 닉과 그의 부인 코라가 등장한다. 이 세사람이 등장해서 만들 수 있는 이야기는 어떤게 있을까?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또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나쁜 일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이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는 사실 빤하다.

그건 바로, 

프랭크는 떠돌이로 닉의 식당에 취직해서 작은 식당에 불과했던 식당을 세계 제일의, 좀 심한가?, 그럼 , 미국 제일의, 이것도 좀 그런가?, 그렇다면 아쉬운 대로, 그 동네 제일의-그 동네가 어디든 간에- 식당으로 만든다는 이야기. 어때? 훌륭하지? 그럼, 코라는 뭐해? 참, 코라가 있었지. 쩝, 다시 짜보자. 알고보니 코라는 주경야독으로 식당경영학(?)을 공부하여 이 바닥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 되고, 그녀의 이런 능력은 동네제일의, 다시 보니 좀 약하네?, 식당이 되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근데, 이거, 왠지 '소설'이 아니라 '성공시대' 냄새가 나는데...... 에이 인심썼다. 힌트 하나 더. 등장인물이 더 있다. 변호사와 검사, 판사가 등장한다.

그럼, 이건 어떨까? 성격차이로 이혼을 준비하던 닉과 코라는 가정법원을 찾아가고 (짜잔, 여기서 변호사, 검사, 판사 등장!), 위기에 빠진 부부를 간이 식당 종업원이었던 프랭크가 다시 화해시킨다? 솔직히 말해봐. 이게 재밌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길. 그러니 몇가지 세부 사항을 더 추가하자. 힌트 둘. '가난하지만 젊은' 프랭크와  '뚱뚱하고 매력없고 나이많은' 닉과 그의' 아름답고 섹시한' 부인 코라가 등장한다. 물론 여기에 변호사, 검사, 판사까지!

이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정답에 가까이 갔을 것 같다. 뚱뚱하고 매력없고 나이많은 닉은 젊고 가난한 프랭크와 아름답고 섹시한 코라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해서 법원을 방문하여 자진이혼(?) 해준다, 라고 상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다시말하지만 뭐, 내가 꼭 삐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제 답은 하나일 것이다. 프랭크는 코라와 바람이 나고, 닉은 그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부인의 불륜을 알게 되어 둘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그래야 눈길을 '쬐끔' 끄는 이야기가 된다. 근데, 이 소설의 작가는 여기에 아주 단순한 한 가지를 더 넣는다. 그건 바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까뮈는 아마도 이 마지막 첨가물에서 <이방인>을 쓸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그게 어떤 타이밍이냐고? 

길지 않은 소설이니 읽어보시길! 이글을 읽는 사람 모두!

 추신: 이번주에 읽은 <이방인>이 학생들에게 어려웠던 것 같다. 별로 새로운 글이 없다. <이방인>을 읽다가 문득 전에 읽었던 <포스트맨......>의 해설에 까뮈의 얘기가 써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다음 주는 <페스트>이다. 개인적으로 <이방인>이 <페스트> 보다는 읽기도 편하고(길이가 짧으니까), 재미있다(믿거나 말거나).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벌써 5주째가 되어 간다. 모두들 즐거운 명절과 행복한 귀향, 귀경이 함께 하시길!

by gosoo71 | 2009/10/01 23:31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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