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편지를 쓴다

1. 들어가는 말.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10/31 예과 강의를 끝으로 드디어 책을 끊어보기로 했다, 물론 당분간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최근들어서 휴식을 위해서 읽던 책이, 글을 위해서 읽게 되고, 글을 위해서 읽던 책이 수업을 위해서 읽게 되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이, 또는 글을 쓴다는 것이 휴식처럼 달콤하거나 편안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으니, 독후감을 쓰지 않고, 독후감을 쓰지 않으니 시간이 펑펑 남아 돈다, 라고 하면 좀 과장이 심한 것이고, 여유 시간이 많아졌다. 

최근에 든 생각인데, 대전 파견과 네덜란드 학회와 강의와 병원 행사로 정신없던 시기가 모두 끝나고 나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일은 하나다. 물론 음악을 듣기도 하고, 영어 공부를 하기도 하고, 연수갈 병원을 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학회지에 발표할 논문을 투고 했고, 논문을 쓸 자료를 모으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잡다한 일들의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그것은 편지를 쓰는 일이다.

학생강의를 위해서 담당자에게 편지로 원고를 보냈고, 연수갈 병원의 담당자들에게 자기소개서를 편지로 보냈고, 증례발표를 학회지에 이메일로 보냈다. 우표를 부쳐서 우체통에 넣거나, 멋진 모양의 엽서 위에 펜으로 끄적거리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편지를 쓰고 있고, 아마도 세상의 많은 이들 또한 나처럼 사랑과 우정, 예술과 영혼에 대한 편지가 아닌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편지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가 샌디에이고 병원에 보낸 'dear professor'로 시작하는 뻔한 내용의 자기 소개서 이메일을 '그'가 봤을까를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편지와 엽서가 아닌 이메일과 문자메시지로, 쉼표 가득한 장문과 감정의 과잉과 낭만의 문장들이 아닌 마침표로 단절되는 단문과 팬시한 이모티콘과 차가운 축약문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시대가 언제쯤부터 시작된 것일까를 잠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열과 성을 다해 편지를 쓴 것이 언제였던가도 생각해본다. 언뜻 생각나는 순간 중에서 그나마 최근은 약 십년 전 영천 3사에서 훈련 받았을 때 집으로 부친 편지들이다.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훈련소의 하루가 시작하고 끝나는 것에 대해서, 어떤 훈련을 받고, 몇킬로미터를 걷고, 아침 점심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와 같은 하찮은 일과에 대해서 모나미 0.7 볼펜으로 쓴 그 편지는 왜 그리도 길었을까? 움직이고, 밥을 먹고, 씻고, 잠을 자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들을 난 왜 그렇게 꼼꼼하게 편지에 기록했을까? 과연 이메일과 문자메시지의 이모티콘으로도 그런 하찮은 일상을 기록하는 감정들을 담아 낼 수 있을까? 이 쯤 되니 편지와 엽서를 보내던 그 시절이, 그러니까 영천 3사에서 훈련 받던 시절이 조금 그리워지려고 한다. 

2. 러브레터, 죽음을 기다리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저자인 앙드레 고르가 자신의 아내인 도린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살아있는 자가 죽어가는 자에게 바치는 사랑의 편지, 그러니까 그 무엇보다도 이 편지의 정체는 러브레터인 것이다. 채팅과 벙개의 시대에 러브레터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이 좀 구식이긴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그(그녀)의 답(답장)을 기다리는 일만큼 아름답고 설레는 일이 있을까? 

사랑에 관한 편지, 또는 사랑에 관한 소설, 아니면 사랑을 다룬 모든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뭘까? 국문학과 수업 시간에 들은 바로는 그건 바로 기다림, 또는 일정기간의 포즈(pause)이다. 편지하면 떠오르는 것이 러브레터이 듯이, 어쩌면 채팅과 벙개가 없던 몇 십년 전에는 사랑하면 떠오르는 것이 러브레터였을 지도 모를일이다. 고백하고 기다리고, 답을 듣고, 사랑에 빠진 이들이 겪는 과정이 고스란히 러브레터를 쓰는 이들이 겪게 되는 과정과 동일하다고 하면 좀 과장일까?

83세의 저자는 죽어가는 자신의 부인에게 러브레터를 보낸다. 하지만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러니 이 편지는 러브레터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언장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인다. 고르의 희망은 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이자 애인이자 동지인 자신의 아내와 같은 날에 죽는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했던 수많은 허구 속의 연인들 보다 더 허구같은 죽음을 택한 고르의 편지가 내게 알려준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하나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아름답게 살 권리와 함께 아름답게 죽을 권리가 있다는 것.  

3. 불안의 기원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가지이다. 첫번째는 무지하게 어렵고 지루하다는 것이다. <성>, <소송>과 장편 뿐 아니라 <변신>이나 <시골의사>와 같은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무지하게 어렵고 한없이 지루하다, 장편의 경우에는 더더욱! 두번째는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불안'이다. 카프카가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불안은 때로는 어떤 걱정이나 근심이기도 하면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존재에 대한 무력함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작가의 작품 속에 나타난 불안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어보면 그의 예민함과 불안의 기원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아버지에 대한 카프카의 생각과 아버지가 가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에 관한 내용을 가득하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또 카프카가 아무리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면에서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태도를 지녔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아버지로서의 '나' 자신과 카프카의 아버지가 크게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에서나, 그것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이든 간에, 아래사람들이 보기에 윗사람들은 모순으로 가득해보이기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카프카가 발견한 것은 모순된 아버지라기 보다는 모순으로 가득찬 현대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그 모순적이고 난해한 소설들을 쓰지 않았겠는가! 의사 역시 마찬가지로 모순으로 가득찬 존재이다. 환자를 고칠 수록 돈을 벌지만, 그래서 질병과 싸우는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질병을 통해서 그리고 아픈 사람들을 통해서 돈을 벌고 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의사들의 목표가 왠지 진실처럼 들리지 않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의사들 중에 여기에 속하지 않는 이들은 아마도 산부인과 의사 정도가 아닐까 싶다. 아기가 많을 수록, 물론 적당한 수준까지만, 의사나 환자나 모두 행복하니 말이다. 산모는 환자가 아니니까.

꼼꼼하고 세심하게,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것처럼, 조목조목 써내려간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불안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보여준 불안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카프카의 아버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카프카가 묘사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난해함과 불안함의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한번쯤 읽어볼 필요가 있다.

4. 맺는말. 너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지금 너에게 쓸 편지에 대해서 생각중이다. 펜으로 써야 할까? 아니면 컴퓨터 자판으로 두드려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또, 무슨 내용을 써야 할까? 나의 하루하루에 대해서? 아니면 궁금한, 그리고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 너의 근황에 대해서? 

나는 조금 새로운 것을 생각해냈다. 어쩌면 이제 부터 쓰게 될 편지는 네게 도착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아니 절대로 도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찾고 있는 것은 펜이나 종이나 컴퓨터가 아닌 유리병이기 때문이다. 투명한, 너무 투명해서 아주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런 코르크 마개 밖에 보이지 않는 유리병 말이다. 그 병 속에 너에게 보낼 편지를 아주 작아질 때까지 여러번 접어서 넣는다. 그리고 강으로 간다. 강가에 서서 어떤 의식을 치르듯이 유리병 속에 비치는, 구름이 조금 끼어 있는, 파란 하늘을 가만히 본다, 아주 잠시 동안. 그리고 결국 강물 위로 유리병을 힘껏 던진다. 유리병은 저만치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저 병은 어디로 흘러 가게 될까? 한강을 따라서 서해로 흘러 들어가 더 넓은 어딘가로 가게 될까?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네가 그 편지를 읽게 될까? 네 바램은 1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수많은 우연이 더해져서 네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의 어딘가에서 그 유리병을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편지는 10년후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이니까, 그리고 너는 나니까, 십 년 후의 나.  

편지를 쓰는 동안 나는 십년 후의 '나'에 대해서, 나의 '미래'에 대해서, 그 미래가 내게 주는 '불안'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십년 전의 나에 대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쓰는 것은 의미없는 일일 것 같다. 왜냐하면 십년 후의 내가 지나간 불안을 궁금해 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또 십년 후의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불안을 겪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 보니 쓸말이 그리 많지 않다. 과거의 '나'가 미래의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나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쁜 일이 아닐까. 어쩌면 구구절절한 '나'의 이야기 보다는 너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줄의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내가 읽을 수 있어서, 아니 읽을 수 있는 내가 있어서 기쁘다는 것. 그래서 너에게 쓴다. 

"너를 만나서 기뻐"

by gosoo71 | 2011/11/18 10:11 | 하루하루 | 트랙백 | 덧글(2)

무한과 윤회의 바다 (강의노트 6)



1. 들어가는 말. 未知生 焉知死(미지생 언지사) 
'죽음'이라는 수업의 주제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어서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합니다. 제 친구, K로 정하죠, 얘긴데요. K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 중 여자관계가 가장 복잡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주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기본이고, 심지어 하루에도 서울의 동쪽과 서쪽에서, 때론 강남과 강북에서, 심지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건물의 정문과 후문에서 각각 다른 여자를 만나는 적도 있었죠. 

바람둥이라고 하니 어쩌면 여러분들은 날렵하고 호리호리한 외모를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K는 100킬로그램이 넘는 후덕한 체구에 넙적한 얼굴을 지닌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K는 여자들의 외모를 그리 따지지 않는 편이었는데요. 제가 그의 모든 여자친구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외모와 관계없이 모든 여자들에게 잘 해주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가 극도로 싫어하는 두 부류의 여자가 있었는데요. 그중 한 부류는 '오빠 난 데...'라는 말로 전화를 시작하는 정체모를 '그녀'들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놀던 곳 근처로 불쑥 나타나는 종잡을 수 없는 '그녀'들이었습니다. 그가 만나는 수많은 여자들 중에서 극히 일부를 본 나조차도 정체모를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나'라는 단어가 그에게 주는 불안감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자신의 머릿 속에 입력되어 있는 그토록 많은 여자들 중에 도대체 아무 단서도 없는 '나'를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 그녀들의 오늘의 '위치'를 불안해하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자친구들 모두에게 GPS 추적장치를 달지 않는 다음에야 그녀들의 위치를 확인할 방법은 없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옆에서 보는 나는 조마조마해서 정작 당사자는 어떨까 싶기도 한데, K는 늘 여유롭고 낙천적이었습니다. 하긴 낙천적이지 않다면 그런 복잡하고 불안한 관계를 견딜 수 없겠죠.

이야기가 옆길로 좀 샜지만, 제가 친구 얘기를 꺼낸 것은 그의 영화취향 때문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그가 묻는 질문은 한가지 였는데요. 주인공이 죽냐? 낙천적인 성격과는 달리 그는 해피엔딩인 영화를 절대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영화를 고르는 기준은 딱 한가지였죠. 반드시 주인공이 죽을 것. 아니, 성격은 낙천적인 사람이 왜 그리 영화 고르는 기준이 우중충하냐고 의아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그의 영화 고르는 기준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의 대답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죽어야 진짜 끝이지."    

K는 영화 속 주인공이 영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살아서 스크린 속 어딘가를 활보하고 다닐 거라는 상상을 하면 불안하고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마치 '그녀'들의 정체와 위치를 모를때 처럼 말이죠. 그의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죽지 않고 살아서 베로나도 아니고 만투아도 아닌 어딘가에서 아들, 딸 낳고 살아가고,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진 안나카레니나는 천만 다행하게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목숨을 건져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고, 아랍인을 죽인 혐의로 기소된 뫼르소는 무죄로 풀려난다면 어떨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이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 만약 이런 식의 해피엔딩이라면 이건 정말 결말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 아닌가요. 그러니 해피엔딩은 진정한 엔딩이 아니라는 K의 생각이 전혀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네요.

허구에서 주인공의 죽음은 작가가 내린 일종의 결론과도 같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K의 말처럼 주인공이 죽지 않는 영화는 결론이 없는 글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르죠. 저는 오늘 강의에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직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未知生 焉知死)는 공자의 말처럼 죽음은 제가 감히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죠. 그럼에도 저와 여러분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의학이라는 학문 때문이죠. 서양의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이룩된 것입니다. 의학에서 시행착오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뭘까요? 그건 환자들의 죽음입니다. 서양의학이란, 특히 임상의학의 경우는 더더욱, 몇백년 동안 수많은 환자들의 죽음을 통해서 얻은 지식 위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수업 시간에서 얘기할 것은 실제 삶 속에서의 죽음이 아닙니다. 허구 속에서의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둘은 별개가 아닙니다. 어느 지점에선가 서로 만나게 되죠. 제가 수업시간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얘기할 것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2. 나머지는 침묵일세(The rest is silence)


독자나 관객이 주인공의 죽음을 보면서 느끼는 반응은 두 가지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이거나 '나라도 저 지경이면 저럴 수 밖에 없지' 전자의 반응이 죽음의 책임을 주인공에게 묻는 것이라면, 후자의 반응은 그 책임을 주인공이 처한 조건이나 환경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경계가 애매모호한 경우도 존재하죠.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잘못으로 인해서 비극에 이른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강력한 외적 조건에 의해서 비극에 이른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죠. 영문학 역사상, 또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유명하면서도 위대한 작품이고, 동시에 죽음에 관한 가장 유명한 대사를 담고 있는 작품.

셰익스피어의 <햄릿>입니다. 작품을 읽어보죠.

(본문읽기 5-10분)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선왕의 유령으로부터 끔찍한 진실을 듣게 됩니다. 숙부 클로디어스가 선왕을 죽였다는 것이죠.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햄릿은 '곤자고의 살해'라는 연극을 공연하게 되죠. 결정적인 장면에서 클로디어스는 서둘러 공연을 중지시키고 햄릿은 숙부가 선왕을 살해했다는 심증을 굳히게 되죠. 클로디어스는 햄릿을 제거할 목적으로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과 함께 영국으로 보냅니다. 하지만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죠. 우여곡절 끝에 햄릿은 덴마크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 온 날 오필리어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오빠인 레어티즈는 아버지 폴로니우스를 죽인 햄릿을 죽이기 위해서 클로디어스와 계획을 세우게 되죠. 레어티즈는 햄릿과 거짓 화해를 합니다. 다음 날 햄릿이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벌어집니다. 파티 테이블에는 독이 든 햄릿의 술잔이 올려져 있고, 레어티즈의 칼끝에는 닿기만 해도 순식간에 죽게 되는 치명적인 독약이 묻어 있습니다. 하지만 클로디어스가 세운 모든 계획은 헝클어지죠. 독배는 거트루드가 마시게 되고, 햄릿 뿐만 아니라 레어티즈도 자신의 칼에 상처를 입게 되죠. 레어티즈는 이 모든 계획이 클로디어스가 세운 것이라는 것을 폭로합니다. 클로디어스는 햄릿의 칼에 죽게 됩니다.

이 작품을 오늘 강의에 등장시킨 것이 단지 '죽느냐 사느냐'로 시작되는 햄릿의 유명한 독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작품이 수많은 죽음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햄릿>이라는 희곡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느냐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등장인물'이 적혀 있는 페이지입니다. 이 연극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습니다. 햄릿, 클로디어스, 거트루드,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레어티즈, 거기에 로젠크란츠와 길든스턴까지. 그리고 이 죽음들을 연결시켜주는 고리는 바로 햄릿 선왕과 오필리어의 장례식, 다시 말해 죽음의 의식, 입니다. 

이 들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덧붙여 주인공 햄릿의 죽음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요? 독자 입장에서 보면 햄릿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복합적입니다. 햄릿의 성격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집요한 운명의 힘을 느낄 수 있죠. 클로디어스의 계획을 간파하여 영국행 배에서 탈출하고, 독이 묻은 레어티즈의 칼끝을 피하고, 독이 든 술잔마저 어머니인 거트루드의 몫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 햄릿은 죽게 되죠. 피에르 바야르는 <햄릿을 수사한다>(여름언덕)에서 햄릿에 대한 해석이 너무 다양하고, 심지어 상반되어 있는 것이 많아서 이들이 같은 작품을 읽은 것이 의심스럽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만큼 <햄릿>이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의미가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이겠죠. 

햄릿의 죽음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셰익스피어가 얘기하려는 것은 두가지로 보입니다. 하나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영화 <햄릿>의 서두에 나왔던 지문 a man who could not make up his mind 이 말해주듯이 햄릿의 성격적 결함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제가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뜻하지 않은 행운에 의해서, 또는 자신의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을 일시적으로 피할 수 있을진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운명의 덫에 걸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죠.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드러내고자 했던 '보이지 않는 힘'이라는 것은 대체 어떤 걸까요. 만약 현대소설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보이지 않는 힘이나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쓴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셰익스피어가 얘기한 운명의 덫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걸까요. 물론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 보이지 않는 힘, 이런 단어를 좀 현대적으로 바꿔보죠. 저는 몇가지 단어가 생각나는 데요. 신분, 종교, 계급, 이념...... 한 인간이 갖고 있는 이런 조건들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끝없이 우리를 쫓아 다니며 운명을 좌지우지하려고 들죠. 그렇다면 현대적이면서 한국적인 햄릿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자신이 처한 조건을 선택할 수 없는, 그래서 망설이는, 하지만 결국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겪게될 주인공.    

3. <광장>을 읽는 세가지 방식
 

<광장>은 대학생이 된 '첫' 해에 읽은 소설이었고, 누군가가 내게 권해준 '첫'번째 소설이었고, 가장 인상적인 '첫' 소설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이 소설을 어떤 식으로 읽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이십년이 넘었으니까요. 읽은 후에 이전에 읽었던 책들과는 다른 감동이 있었다는 것만 얼핏 기억나네요. 아마도 이번에 읽는 것이 다섯번째나 여섯번째 일 것 같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에 읽을 때는 집중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읽어서 일 수도 있고, 어쩌면 소설은 그대로지만 내 나이가 이십대가 아닌 사십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스물 다섯의 작가가 쓴 글을 이십 대의 독자가 받아들이기는 쉬워도 사십대의 독자가 받아들이기는 어렵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아니, 그것도 아니라면 이데올로기와 한국전쟁과 사랑에 관한 서사가 이십대에게는 매력적이지만, 사십대에게는 별로 관심을 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십년의 세월만큼 늙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만큼 성숙해진 것일까요? 본문을 읽어보죠.

(본문 읽기 5-10분)

이 소설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중 첫번째는 이념과 체제에 관한 이명준의 비판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인용하면, 남한의 정치의 광장에는 자루와 도끼와 삽을 들고, 눈에는 마스크를 가리고 도둑질하러 나온 정치가들로 가득하고, 경제의 광장에는 사기의 안개 속에 협박의 꽃불이 터지고 허영의 애드벌룬이 떠돌고 있고, 문화의 광장에는 헛소리의 꽃이 만발하고 아편 꽃 기르기가 한창입니다(전집판, 50쪽). 북한 또한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하고, 인민들은 복창만 할 뿐입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짓고 인민은 복창만 하는 나라(전집판, 105쪽).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도 없고,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도 없는, '공문'으로 보내진 혁명으로 건설된 공화국. 이 공문을 보낸 이들은 바로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 인 붉은 군대죠(전집판, 122쪽). 북한 역시 혁명의 소문을 들었을 뿐, 아무도 혁명의 감격을 느낀 이는 없습니다. 밀실만 있고 광장만 있는 남한과 광장만 있고 밀실은 없는 북한, 이명준은 이 두 곳 모두에서 회의를 느끼죠.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남한도 북한도 아니라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요. 이명준은 결국 중립국을 택하게 됩니다. 이십대에 읽었을 때는 중립국을 택한 이명준의 결정을 이 소설의 메시지로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구성을 보면, 이 소설은 이명준이 중립국을 택한 사실을 처음부터 독자에게 알려주면서 시작합니다. 그러니 만약 작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단지 이명준이 중립국을 선택했다는 사실이었다면 이 후의 내용은 대부분 동어반복이 되는 셈입니다. 남한에서 북한으로, 북한에서 중립국으로, 인도의 캘커타로 향하는 타고르 호에 올라 탄 이명준의 인생 역정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면, 이명준의 인생 역정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 뿐아니라 소설 속의 주인공인 이명준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어야 합니다. 타고르 호에 탄 이명준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왜냐하면 이명준은 소설의 처음에 예상했던 중립국이 아닌 자살, 정확히 말하면 실종, 이라는 네번째의 선택을 하기때문입니다. 네번째의 선택을 결심한 이명준이라는 인물의 심경의 변화를 읽고 추측해보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을 읽는 두번째 방식이죠.  

마지막으로 이 소설을 읽는 세번째 방식은 다섯번의 개작을 시도한 작가의 입장에서 작품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1989년 전집판에 실린 김현의 해설은 세번째 방식으로 <광장>이라는 작품에 접근합니다. 이념과 체제의 광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명준이 선택한 자살, 그러니까 사라짐, 이라는 결정을 김현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풀었습니다. 이념과 체제에 지친 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서 작가가, 아니 이명준이 붙잡아야 했던 것이 고작 '사랑'이라는 사실이 너무 구태의연한가요. 하지만 성스럽거나, 속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제껏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아름다우면서도 강력한 것이 없다는 것을.

4. 이명준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 

"미스터 리."
 "네." 
"인도에 가면 내 근사한 미인을 소개함세."
"미인을요."
"음 내 조카야. 먼저 우리 집으로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광장/구운몽>(문학과지성사, 165쪽)-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앞서의 맥락에서 <광장>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죠. 두 마리의 갈매기는 타고르 호를 계속 따라옵니다. 이 두마리의 갈매기는 타고르 호를 따라오는 어미와 새끼이면서 동시에 이명준을 좆는 환생한 은혜와 딸입니다. 남한도 북한도 아닌,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밀실도 광장도 아닌 곳, 이명준은 결국 중립국이 아닌 자살(?)을 선택하게 되죠. 하지만 이명준의 자살이 운명을 거역한 주인공이 겪게 된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개인의 구원으로 느껴지는 것은 지상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가 행복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명준의 자살은 소설 속의 개연적인 사건이 아닌, 그를 구하기 위한 작가의 비현실적인 개입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입니다, 작가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여운 인어 공주님, 당신도 우리처럼 온 마음으로 노력했어요. 고통을 받고 그걸 참아 냈지요. 그런 착한 노력 때문에 당신을 천사들의 세상으로 올라오게 된 거예요. 이제 당신도 삼백 년이 지나면 죽지 않는 영혼을 얻을 수 있어요.
-<안데르센 동화집>(비룡소)에 실린 <인어공주> 중에서-

가끔씩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다보면 뜻하지 않은 내용을 읽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언젠가 <인어공주>를 읽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면서 끝나지 않더라구요. 물거품이 된 후에 그녀를 동정한 천사들이 인어공주의 '착한 노력'을 가상히 여겨 그녀가 죽지 않는 영혼을 얻게 될 것이라고 위로합니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기엔 군더더기처럼 보이는 마지막 장면은 <인어공주>라는 이야기 밖에서 이루어지는, 인어공주에 대한 독자들과 작가의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에둘러 왔지만, <광장>의 마지막 장면도 작가의 이런 심리가 들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남에도 북에도 섞일 수 없는 이명준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를 차마 죽이고 싶지는 않은 작가의 복잡한 심리가 '죽었다'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마지막 장면에 드러나 있습니다. 

흰 바다새들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마스트에도, 그 언저리 바다에도.
아마, 마카오에서, 다른 데로 가버린 모양이다.
-<광장/구운몽>(문학과지성사, 170쪽)-   


이명준은 죽지 않은 걸까요. 그렇다면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질문을 바꿔보죠. 만약 이명준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가 타고르호를 타고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요? 이명준을 중립국으로 태우고 가는 타고르 호의 목적지는 인도의 캘커타 입니다. 중요한 것은 중립국이나 캘커타라는 도시명이 아니라 '인도'라는 나라지요. 덧붙여 타고르 호를 쫓아온 두마리의 갈매기는 은혜와 딸을 '상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딸로 '환생'한 것입니다. 이명준의 사라짐, 목적지인 캘커타, 은혜와 딸의 환생, 이 모든 단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것은 이명준이 탄 배의 목적지인 인도가 '무한'과 '윤회'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명준의 실종을 바다에 빠져 자살한 것이 아니라 무한히 도는 윤회의 바퀴 속으로 사라진 것이라는 저의 해석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5. 늙고, 병들고, 죽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하는 서류 작업 중에 하나는 시체검안서를 작성하는 일입니다. 해마다 다르고, 달마다 다르지만 가장 시체검안서를 많이 써야 하는 달-대개 12월이나 1월일 것 같은데-에 발행되는 시체검안서는 몇 장이나 될까요? 전혀 감이 안잡히실테니 빨리 답을 말씀드리죠. 백장 정도 됩니다. 백명의 시체를 보고, 백명의 사망을 확인하고, 백명의 죽음의 원인을 추정해주죠. 제가 뜬금없이 시체검안서 얘기를 꺼낸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죽음의 의미는, 햄릿과 이명준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와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실제와 허구의 세계는 다른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허구의 세계 속에는 작가의 의도, 메시지, 암시, 복선과 같은 장치와 원리들이 작동하고 있지만, 실제의 세계 속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어떤 원리가 있다면 그건 질병이나 생리적인 노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저희가 지금껏 햄릿과 이명준의 죽음의 의미를 알아보았지만 실제 세계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는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죽음은 메시지를 담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이죠.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을 떠나는 일, 이것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김훈은 <강산무진>속에 실린 여덟 편의 단편을 통해서 늙음, 질병, 죽음이 일상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의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택시기사도(<배웅>), 등대장도(<항로표지>), 대기업의 임원도(<화장>, <강산무진>), 대학교수도(<뼈>, 형사도(<고향의 그림지>), 복서도(<머나먼 속세>) , 그들이 속세에서 살고 있는 삶의 방식과는 상관없이 모두 비슷비슷한 삶의 과정을 경험하게 되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피해 갈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이들 모두는 현실 속에서, 혹은 소설이라는 무대 속에서 늙고, 병들고, 죽습니다. 사업에 망하고, 부정을 저지르고, 불륜을 꿈꾸고, 이혼당하고, 범인을 놓아주고, 고국을 떠나고, 스승을 배반하죠. 이들이 겪는 변화와 몰락의 중심에는 암시와 복선과 음모가 아니라 뇌종양이나 폐암 같은 질병이나 폐경과 같은 생리적인 늙음이 있습니다. 

병과 늙음을 통해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의 특징들은 무화되어 버립니다. 어찌보면 작가가 말하려는 것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현실 속의 인간이라는 존재도 생로병사라는 과정속에서 모두 구분이 되지 않고 희석되고 섞이어서, 미세한 차별성조차도 무화되어버리는 비스무래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물이나 바람이나 빛처럼 말이죠.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공간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모두 비슷비슷 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화장>은 뇌종양으로 사망한 아내의 장례식장이 배경입니다. 본문을 읽어보죠. 

(본문 읽기 5-10분)

현실의 삶에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장례식장의  풍경을 한 번 떠올려 보죠. 오열하는 가족들과 슬픔에 찬 친지들, 그리고 장례식장 어딘가에서는 누군가가 고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장례식장의 풍경입니다. 김훈이 <화장>에서 보여주는 장례식장의 풍경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것은 장례식장의 풍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덧붙여 장례를 치르는 주인공의 애도의 감정을 그리고 있지도 않습니다.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죽음은 누런 위액을 토해내는, 죽안에 담긴 쌀알까지도 대변으로 지리는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삶의 마지막 과정일 뿐입니다. 

아내가 죽은 후 주인공은 병원비와 장례식장 비용에 대한 영수증을 받습니다. 그리고 비뇨기과를 방문하죠. 전립선염 때문에 방광에 가득찬 소변을 뽑기 위해서죠. 주인공에게 남아 있는 것은 아내에 대한 연민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전립선염으로 소변을 보지못해서 생긴 복통과 병원비 4천만원이 찍혀 있는 영수증입니다. 주인공은 불경스럽게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 추은주라는 여직원,를 떠올립니다. 애도는 아내를 쏙 빼닮은 딸의 몫이죠. 애도와 슬픔은 생리적인 현상으로 대체되고 죽음의 의미는 영수증에 정산됩니다. 이런 방식은 다른 작품속에도 드러나있습니다. 형부의 죽음 후에 찾아 온 언니의 폐경(<언니의 폐경>)이나 간암을 진단받은 자가 처리해야할 재산(<강산무진>)이 거기에 해당하죠.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아내가 기르던 보리라는 이름의 개를 안락사시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대요. 왜냐하면 보리라는 개의 이름은 불가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작품 속에 나오는 여러가지 단서들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보리라는 개는 아내의 분신이죠. 동시에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얻게 된 어떤 깨달음, 그러니까 보리(提),을 의미하기도 하죠. 주인공이 아내의 죽음을 통해서 몸으로 깨달은 것은 육체적인 고통(복통)이었지만, 이것은 어느 순간엔가 다른 여인(추은주)에 대한 육체적인 쾌락과 욕망이 됩니다. 하지만 아내의 사망과 함께 고통과 욕망은 물질로 정산되고, 광고문구와도 같은 관념이 되어버리죠. 결국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보리'는 뭘까요? 죽음이 고통일 수도 있지만 쾌락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게 아니면 지혜라는 열매 속에는 고통 뿐만 아니라 욕망의 몫도 존재한다는 것?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고통과 욕망과 관념이 사실은 하나라는 것?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보리일 수도 있겠죠.

6. 이명준, 환생하다  

기억하라,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발레리-
 

성격과 운명에서 시작해서, 이념과 체제를 거쳐서, 질병과 늙음이라는 한계까지. 저희가 지금까지 살핀 작품 속에서 비극을 일으킨 조건들이 여러분들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나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가장 익숙한 요소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그것을 삶의 조건으로 여기지도 않을 정도죠. 근데 그게 대체 뭘까요? 본문을 읽으면서 생각해보죠.

(본문읽기 5-10분)
 


앞서 말한 것처럼 <광장>의 이명준은 죽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물론 현실 속에서는 과학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일이지만, 또 <광장>이라는 소설 속에서는 소설의 내적 규칙들에 의해서 허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이명준은 무한과 윤회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십 수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한반도의 땅에 태어납니다. 김성훈, 1963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30연락소에서 남파 공작원 훈련을 받은 후 남파되어 1985년 용산의 한 동사무소에서 김기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1986년 연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고, 대학생 시절을 주사파로 보내면서 그는 남파된 간첩들에게 형식적인 신분 증명이 아닌 생생한 일상의 내러티브를 교육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그를 지도했던 이상혁이 북에서 숙청되면서 김기영이 속했던 조직은 사라져 버리죠. 십 년간 그는 북한 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원들과의 연락이 끊깁니다. 배는 불룩나오고 팔에는 물살이 출렁대는 평균적인 몸매를 지닌 중년 남자로, 영화수입업자로, 장마리의 남편으로, 현미의 아버지로 살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연락이 오게 되죠. 이 십년 동안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4번 명령이 민음사 세계 시인선 53권 67쪽에 쓰여진 마쓰오 바쇼의 하이쿠를 통해서 전달되죠. 그 암호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을 청산하고 즉시 귀환하라. 이 명령은 번복되지 않는다."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이 소설은 십년 만에 북의 지령을 받은 남파 간첩 김기영과 그의 가족들이 겪게 된 하루를 보여줍니다. 김기영을 이명준의 환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 중에 하나는 둘이 가지고 있는 고민이 동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을 선택할 것이냐, 북을 선택할 것이냐. 남과 북의 체제를 모두 경험한 두 주인공의 공통적인 결론은 둘 모두 '지상낙원'은 아니라는 것이죠. 이것이 두번째 이유입니다. 세번째는 이들의 최종적인 결정인데요. 이명준은 타고르호를 계속해서 따라오는 두 마리의 갈매기가 은혜와 딸의 환생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실종되고, 김기영은 잠수정을 타고 월북을 시도하다가 사살되는 쇼를 벌이게 됩니다. 김기영은 결국 남에 남게 되지만 자의가 아닌 '국가'라는 타의에 의해서죠. 그러니 이명준과 김기영 둘 모두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명준과 김기영이 공통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모든 주인공들의 죽음들이 보여주려고 한 것이 결국 삶의 조건들이라면, 이 작품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이명준의 죽음(사라짐)이 미처 보여주지 못한 삶의 조건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남과 북, 두 체제에서 모두 회의를 느낀 이명준이 돌아간 곳은 윤애와 딸이 환생한 무한과 윤회의 바다였습니다. 이 속에는 개인의 구원이 이념과 체제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습니다. 작가가 선택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도 사람들은 사랑했을까?"
[......]
"깡통. 말이라고 해? 끔찍한 소릴? 부지런히 사랑했을 거야. 미치도록. 그밖에 뭘 할 수 있었겠어."
-<광장/구운몽> 279쪽-

소설 <구운몽>의 마지막 장면은 이를 뒷받침합니다. 하지만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것만으로 삶을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여기에 <강산무진>의 여덟 편의 단편들이 보여주었던 노화나 질병과 같은 현실을 지배하는 원리들을 덧붙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빠져있는 걸까요? 이명준이 김기영으로 환생하고, 그가 장마리와 결혼을 하고, 현미의 아빠가 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으로 모든 삶의 조건들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일까요? 행진곡의 나라에서 남파된 간첩 김기영의 두통은 약이 아닌 유키구라모토의 음악에 의해서 호전되고, 만수대 예술단원이자 북한 최고의 무용수였던 정희는 냉면집 사모님이 되고, 동사무소에서 김기영의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주었던, 무게와 질량이 있는 자본주의의 권태로 찌들어 있던, 고정간첩은 몇년 후 여호와 증인이 되어서 그 앞에 다시 나타납니다. 폭스바겐을 판매하는 김기영의 부인 장마리는 이십대 법대생들과의 난교에 열중하고 학교에서는 집단 따돌림과 장애인에 대한 학대가 난무하죠. 이것이 주인공 김기영이 살고 있는 2000년의 대한민국의 모습입니다. 사회주의 낙원과 롯데월드의 차이처럼, 김기영이 숨을 쉬고 있는 2000년대의 한국은 북조선과도 완전히 다르고, 1980년대의 남한과도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었습니다. 말초적인 욕망과 육중한 권태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사회, 이념도 없고 유토피아에 대한 희망 없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삶. 

이 소설의 주인공 김기영은 앞서서 제가 여러분에게 던진 질문- 여러분의 삶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깨닫게 됩니다. 130연락소의 훈련이나 사상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남한의 삶을 통해서 체득하게 된 것이죠. 그가 깨달은 답, 그건 일상이라는 거대한 굴레죠. 이것은 어떤 교육이나 이념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고 치명적이죠. 목표가 없이 보낸 십년의 남한 생활은 서서히 그의 몸에 스며들어서 김기영의 몸과 습관과 사고방식마저도 바꾸어 버립니다, 본문 중에 인용된 폴 발레리의 싯귀- 기억하라,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처럼 말이죠. 50년 전의 이명준이 겪게 되는 비극은 자신이 꿈꾸는 최선의 삶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김기영이 겪게 되는 비극은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꿈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 버린 삶, 또는 아무 생각없이도 굴러가는 삶. 이런 삶 속에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따윈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자신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서 굴러가게 되어 있으니까요. 

7. 맺는말. 다시, 未知生 焉知死
未知生 焉知死, 생에 대해서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는 공자의 말 속에는 죽음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삶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살펴 본 문학작품들속에 등장한 죽음의 의미 역시 비슷할 것 같습니다. <햄릿>은 망설이는 주인공과 그를 끊임없이 쫓아 다니는 죽음의 운명을 보여줍니다. <광장>은 이념과 체제라는 현대적인 의미의 운명에 저항하는 인물, 이명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는 현실 속에서 패배하고 사라집니다. <강산무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노화와 질병과 죽음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으며 늙고 병들고 죽어갑니다. 그리고 이 주인공들의 죽음은 물질성과 세속적인 욕망들로 연결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삶이 비극이라는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비극이 아닌 삶, 다시 말하면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빛의 제국>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비극, 주인공의 죽음,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저는 이 지점에서 문학과 의학이 '죽음'이라는 주제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의학과 문학이 죽음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 둘의 근본적인 목적이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들 또한 평생동안 의학을 배우고 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배우게 될 의학이라는 학문 속에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을 담기를 바라겠습니다. 

by gosoo71 | 2011/09/04 09:37 | 문학, 의학을 이야기하다 | 트랙백 | 덧글(2)

설마, 우연이겠죠? (병원제출용)


베스티안 우송병원은 대전역에서 걸어서 5분정도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습니다. 병원 정문에 들어서서 보면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왔던, 이글거리는 사우론의 눈이 올려져 있던 탑처럼 생긴 한국 철도공사 건물이 병원 배경으로 보이고 두 건물 아래로 아담한 3층짜리 병원 건물이 보입니다. 물론 '두 개의 탑' 위로는 사우론의 검붉은 눈동자가 아닌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날씨가 좋을 때에 한해서요.

병원 마당(?)- 베스티안 우송병원의 주차장은 왠지 주차장보다는 '마당'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립니다-의 왼쪽 편에서는 담쟁이들과 작은 나무들이 햇볕을 간신히 가려서 만든 그늘에서 환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벤치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뒤로는 건물의 맨 위에 설치된 베, 스, 티, 안, 우, 송, 병, 원 여덟 글자와 그 아래로 '솔파란 아동연구소'와 '베스티안 중앙연구소'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거기서 좀 더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붉은색 배경의 '응급실' 간판이 보입니다. 얼핏 보면 이들은 아무런 연관 없이 베스티안 우송병원의 건물에 세를 든 한지붕 세 가족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을 교육하고, 실험과 기초연구를 진행하고, 환자를 진료하는 것이 목적인, 전혀 다른 세 종류의 장소가 베스티안 우송병원 건물이라는 하나의 장소에 모여 있는 것이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한지붕 세 가족이 수많은 대형병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말할 때 이야기하는 세 가지 단어-교육, 연구, 진료-를 의미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베스티안 우송병원 건물의 외관은 우송병원, 아니 베스티안 병원이 존재하는 목적이 교육과 연구와 진료라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설마, 우연이겠죠?

영화 『쿵푸팬더』에서 대(大)사부 우그웨이는 식탐팬더 포를 '용의전사'로 점지합니다. 우연한 사고(?)로 용의 전사가 된 포를 인정하지 않는 사부 시푸에게 우그웨이는 '우연은 없다'는 알듯 모를듯 한 설명을 합니다. 진짜 그럴까요? 우그웨이의 말처럼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어떤 필연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걸까요? 하지만 이 영화를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우연은 없다'라는 단정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용의 전사를 만들 완벽한 쿵푸라는 것이 용의 문서 속에 비밀스럽게 씌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연을 우연이라고 믿는데서 끝내지 않고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 보죠. 베스티안 우송병원 건물은 예전에는 대전 동중학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건물의 외관에 담긴 의미와는 관계없이 이 건물의 내부와 가장 닮아 보이는 것은 바로 학교입니다. 병원 정문을 지나서 병원의 내부로 들어오면 이 사실은 좀 더 분명해집니다. 아마도 병원 마당과 공원은 운동장이었을 것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원무과와 진료실은 교무실이었을 것이고, 복도를 따라서 운동장 쪽으로 나있는 창문과 마주보고 있는 병실은 칠판과 교탁이 있는 교실이었을 것입니다.

우연히 모인 세 곳의 장소, 학교의 내부를 가진 병원. 대(大)사부 우그웨이였다면 아마도 이것 역시도 우연이 아니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곳이 어떤 ‘변화’를 원한다면? 다시 말해서 교육과 연구와 진료를 목표로 하는, 학교의 내부(또는 내면)를 가진 병원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어떤 걸까요? 진짜 우연이지만 그건 공부의, 중국어로는 쿵푸의, 원리 속에 있을 것 같습니다. 마당을 쓸고, 물을 길어오고, 빨래를 하는 것. 수많은 쿵푸영화 속의 주인공들은 먼지 쌓인 권법 책을 숙독하고, 울퉁불퉁한 근육을 만들면서가 아니라 이런 일상적이고 하찮은 일을 반복하면서 고수가 됩니다.

아마도 좋은 병원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들도 이와 비슷할 것 같습니다. 으리으리한 외관을 꾸미고, 휘황찬란하게 내부를 장식하고, 첨단 시스템으로 무장하는 것만으로는 좋은 병원이 될 수가 없으니까요. 좋은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들은 일상적이고 하찮은 일들 속에 있습니다, 쿵푸의 원리처럼요. 병원 마당의 휴지를 줍고, 병원 내부를 청소하고, 먼지로 뿌옇게 된 유리창을 닦는 일. 덧붙여 낡은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불행을 당한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일. 아마도 이것이 최선의 답이 아닐까요.

병원 직원들이 6월부터 ‘Active Bestian 운동’을 하느라 분주합니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서 머리를 짜내고, 매일 아침, 점심으로 나와서 병원 주변을 청소하고, 복도에 서서 주문을 외듯이 무언가를 함께 다짐합니다. 그런데, 왠지 요즘 병원 직원들의 모습이 제가 말한 최선의 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설마, 우연이겠죠?

by gosoo71 | 2011/07/25 12:18 | 하루하루 | 트랙백 | 덧글(0)

토끼가 주인공이라고?


우선 토끼가 주인공이라는 것이 맘에 걸린다. 사자, 호랑이, 독수리 등등 멋있는 맹수들도 많은데 왜 하필 토끼야! 그리고 하나 더! 환타지라니! 환타지 소설의 책표지라면 뭔가 의미심장한 그림이 그려져 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정체모를 풀밭과 아무 특징없는 토끼 한마리라니. 이 책에 대한 수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1권만 샀다. 재미없으면 팔고 없던 일로 하려고.    

읽기 전에 재미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도 결국 읽기 시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토끼로 만들 수 있는 환타지라는 것이 대체 어떤 걸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음,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슈퍼 토끼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초인적, 아니 초묘적(?) 적인 토끼의 신비한 탄생과 여우와 개와 고양이와, 인간을 물리적으로 압도하는 능력이 만들어 내는 갖가지 영웅담! 근데 이건 너무 유치하다. 아마 애들도 이런 이야긴 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마법에 걸린 토끼 공주와 소년과의 사랑이야기는 어떨까?  계모인 마녀의 마법에 걸려 토끼가 된, 물론 이것 역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지만, 공주는 사랑하는 이의 눈물이 닿는 순간 마법에 풀리게 된다. 마녀가 풀어 놓은 늑대에게 쫓기던 공주는 우연이 소년에 의해서 구출된다. 그리고 여차저차 해서 이 둘이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또 여차저차해서 마녀를 내쫓고 둘이 잘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 근데 이것도 왠지 영......  

막상 1권을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이 책 속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환타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 속의 주인공인 헤이즐, 파이버, 빅윅, 스트로베리, 댄더라이언 등등의 토끼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단지 풀을 뜯고, 엘릴(토끼어로 토끼들의 '적')을 피해서 도망다니고, 짝짓기를 위해서 암토끼를 찾아다니는 게 고작이다.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물리적 능력이래야 기껏해야 고양이를 혼내주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들포드 마을을 떠나 워터십 다운에 정착하는 토끼들의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아니, 풀뜯고(토끼어로 '실플레이'), 도망다니고, 굴파는 얘기가 어떻게 흥미진진한지 도저히 이해가 안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언뜻 생각나는 이유는 이 소설이 지극히 '토끼'스럽다는 점이다. 앞서 내가 얘기한 슈퍼 토끼와 마법에 걸린 토끼들은, 토끼의 탈을 쓰고 있을 뿐 실제로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다. 악당들을 물리치고, 사랑을 하고, 마녀를 물리치는 이야기가 인간들의 '환타지'라면, 엘릴들로부터 꾀를 내어 달아나고, 짝짓기를 할 암토끼를 찾아 목숨을 걸고, 힘센 토끼(운드워트)로 부터 자신의 마을을 지켜내는 이야기가 바로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다.  

만약 토끼들의 소박한 환타지가 좀 더 '현실적'이라고 느낀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슈퍼맨과 마법과 공주가 사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소설 속에 나오는 토끼들처럼 미래를 불안해 하고, 수많은 적(경쟁자)들을 피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워터십 다운과 같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by gosoo71 | 2011/07/13 10:21 | 서평 | 트랙백 | 덧글(0)

'사랑'의 바다를 비추는 신대륙


해부학자의 삶을 다루었다는 설명만 보고 덜컥 주문해 버린 책이다. 그러니 페데리코 안다아시라는 작가의 이름은 당연히 처음 듣는 것이고, 작가의 나라인 아르헨티나- 메시? 참 보르헤스가 있었군- 역시 소설이라는 분야와 관련해서는 그리 익숙한 나라가 아닐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덜컥 사서, 후다닥 읽은 것은 '해부학'이라는 한 단어 때문이었다.   

막상 책을 사서 표지와 속지에 쓰인 설명을 보면서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해부학자 마테오 콜롬보가 발견한 것이 그 뭐냐... 음... 그러니까... 흠흠...작년 광고계 최대 유행어로 표현하자면, 참, 뭐라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는, 여성 질 속의 해부학적 구조인 클리토리스였다는 사실이다. 클리토리스가 뭐냐고? 아마도 인터넷으로 클리토리스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우선 이 단어를 검색창에 치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는 곳에서는 검색하지 말자, 검색자가 19세 이상임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심상치 않은 단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단어를 검색해서 나오는 것은 형이상학과 아주 거리가 먼, 주로 허리하학(?)에 관한 것들이다.   

여성 질 속의 구조물이면서 여성의 성감대 중의 하나인 클리토리스. 이것을 발견한 해부학자의 삶이, 이 소설이 사실이든 허구든 간에, 결코 마테오 콜롬보의 스승이면서 실제 시체를 최초로 해부한 베살리우스나, 폐순환을 발견한 윌리엄 하비의 삶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베살리우스는 산사람을 해부했다가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성지순례를 하던 중에 죽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 속엔 성스런 아우라가 있다. 하지만 마테오 콜롬보가 발견한 것은 클리토리스다. 그러니 그의 삶이 해부실과, 강단과, 아카데미와, 연구실, 그러니까 연구와 진료와 교육을 오가면서 전개될 것이라는 우아하지만 속보이는 상상을 하지는 말자, 그건 저자와 독자 자신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클리토리스는 그런 삶 속에 들어가 있을 만한 단어가, 아니 해부학적 구조가 아니다.   

저자가 고른 독특한 신대륙, 동명의 탐험가 콜롬버스가 발견한 신대륙처럼,은 여성의 '그곳'과, 남자의 '그곳'과, '그곳'의 유곽과, 변태와, 유아성애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한 바다 위에 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 더! 이 소설은 속된 욕망의 배설과 금기를 꿈꾸는 지점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랫동네와 매음굴을 전전하던 이 작품은 콜롬보의 재판과정으로 넘어와 그의 논문의 각장을 상세하게 공개하면서, 단지 야한, 또는 관능적인 소설의 차원을 넘어선다.  

콜롬보가 논문을 통해서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사랑이라는 욕망이 클리토리스라는 구체적인 구조물과 어떤 카이네틱스로 연결되는 것이냐에 관한 것이면서, 동시에 영혼과 신앙의 문제가 관능과 쾌감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 구원할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좀 더 단순화 시키면,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성, 성과 속 이라는 중세적 이분법들을 '클리토리스'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도의 중심에 있는 단어는 바로 '사랑'이다.  

그는 자신의 신대륙에서 무얼 보았을까?  

그래, 모나 소피아! 하지만 '사랑'의 바다위에 떠있는 신대륙을 발견한 해부학자, 마테오 콜롬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매독으로 썩어가는 연인의 몸뚱이였다. 유곽의 마돈나, 속됨과 육체적 욕망의 결정체! '사랑'이라는 단어는 늘 아름답고 찬란하지만 그것을  비추는 육체는 언젠가 썩어 없어진다. 비록 그것이 너무 찬란하도록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by gosoo71 | 2011/07/11 15:55 | 서평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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