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독'과 '이단'이 아닌, '이해'를 위하여



"그래서 요즘 네가 말이 많구나"

김용옥씨의 책을 읽고 나면 말이 많아진단다. 이건 내 얘기가 아니라 내 주변의 누군가가 내게 했던 얘기다. 우선 누군가가 내게 한 이 말의 의미가 내가 말이 많음을 비난하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둔다. 그럼 그게 무슨 뜻일까?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말이 많아진다는 것을 좋은 의미로만 해석하면, 읽고나서 많은 것들을 잊어버려도 어느 정도는 떠들 수 있을 정도의 풍부한 지식이 그의 책 속에 들어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그 분야의 문외한들도 아는 척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이 잘 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을 읽는동안 머릿 속은 새로운 지식들로 꽉꽉 채워지며, 지적인 포만감(?)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기쁨으로 들뜨게 된다.


<금강경강해>가 그랬고, <요한복음강해>가 그랬다. 개인적으로 그의 초창기 책들보다는 요즘의 책들이 훨씬 더 안정감이 있어서 좋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현학적인 문장을 지녔을 김용옥씨의 최대 장점은 금강경이나 성경, 불경, 도덕경, 논어 같은 무미건조하고 딱딱한할 것만 같은, 그래서 전공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을 텍스트들을 흥미진진하고 말랑말랑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해 준다는 것이다. 


<기독교 성서의 이해> 역시 성서라는 텍스트의 콘텍스트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모호한 의미들을 다양하게 분석해내는 그만의 탁월한 재주가 돋보인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의 목적은 '이해'를 위한 것이다. 김용옥씨가 책속에서 종종 언급하는 것처럼 이 책이 이루려는 '이해'를 누군가는 '신성모독'이나 '이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이 말을 책속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것으로 봐서 '이해'가 목적이라는 그의 말은 진심인 것 같다. 그럼에도 만약 누군가가 워낙에 도그마라는 것이 의문을 달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가 시도하려는 '이해'는 본질적으로 '이단'과 '신성모독'의 차원에 속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서를 절대부동의 '도그마'가 아닌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될 '복음' 또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이를 듣고 싶어하는 이들은 말씀의 '의미'를 궁금해 할 수 밖에 없고, 이런 궁금함은 당연히 '이해'를 하기 위한 노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째서 성서는 27서만으로 이루어졌을까? 다른 성경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까? 왜 신약 속에는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가진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가지 복음을 연달아서 붙여놓았을까? 네 복음이 있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복음서들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의 디테일이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사렛 예수는 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까?


이러한 의문들은 끝이 없다. 독실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궁금할 수 밖에 없는 이 당연한 의문들을 김용옥은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간다. 이 책이 안정적이라는 것은 김용옥이 자신의 책속에서 종종 보여 주는 나르시즘과 그로 인해서 삼천포로 빠지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성서 27서의 성립배경, 동정녀 잉태설, 베들레헴에서 예수가 태어난 이유, 바울의 서한들의 의미와 형식에 관한 그의 설명은 논리적이고 명쾌하다. 혹 그의 설명을 듣는 이 들 중에 일부는 그의 의문과 충격적인 해석에 대해 반감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의 '이해'가 갖는 거침없는 의문들과 해석들이 성서의 권위를 일부분 깎아내렸을 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대하기 어렵기만했던 성서를 훨씬 더 친근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읽히기보다는 들리기를 원했던, 한 사람의 독자보다는 다수의 청자를 확보하고자 했던 복음(gospel)의 본래적 목적은 권위와 절대성보다는 친근함과 대중성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문'과 '이해'는, 아무리 성서가 논리적인 구성물이 아니라 할 지라도, 무작정 믿어야 한다는 '의무' 나 '맹신'보다 훨씬 더 신앙적인 것이다.


이런 '이해'의 순수한 의미를 믿는다면 이 책의 의미는 김용옥의 말처럼 절대로 반신앙적이거나 탈신앙적인 것이 아니다. 책을 덮고 나서 든 첫번째 생각은 신약 4대 복음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 겠다는 것이었다. 이렇다면 적어도 내게는 이 책이 준 '이해'가 성서의 말씀에 더 가까워지게 해준 것이 아닌가!

by gosoo71 | 2008/09/27 12:26 | 독서일기 | 트랙백 | 덧글(0)

무릇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 뿐이다

포스터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것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 뿐이다
                                                                                                                                    -영화 <달콤한 인생> 중에서-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보자. 보스의 애인은 딴 남자와 바람이 났고, 그는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가 해야 할일은, 말하나마나이지만, 현장을 급습하고, 보스의 애인의 애인(?)을 처리-아마도 죽여야 겠지?-한 후에, 보스에게 전화를 해야 하는 것이리라. 근데......잠깐......핸드폰 폴더를 다시 닫는다. 하지만 그때, 우연히, 아니 그보다는 갑자기, 이 상황을 보스에게 보고 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네가 알아서 해"라고 보스가 얘기하지 않았던가. 그래, 한 번 봐주자, 아니 기회를 주자. 왜 그는 갑자기 그 순간에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강사장(김영철)의 말처럼 보스의 명령은 틀려도 일단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그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보스의 명령은 틀릴 수는 있지만 유보되거나 재고되는 일은 없다. 그걸 모르는 똘마니는 똘마니가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때문에 흔들렸느냐. 보스의 명령이 불분명해서? 보스의 어린 애인과 그녀의 애인이 불쌍해져서? 갑자기? 아니면, 나무가 흔들려서? 나뭇가지가 흔들려서? 무릇 움직이는 것은 네 마음뿐이다. 강사장은 그걸 알고 있었다. 흔들리는 것은 마음뿐이라는 것.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보니 그가 할 말이 대충 예상이 된다. 에이, 한 번에 거절해야지하면서 전화를 단번에 받는다. 그의 질문도 나의 대답도 예상대로다. 뻔한 질문과 뻔한 대답. 하지만 왠걸, 난 전화를 끊지 못하고 그에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생각해 보고 다시 전화드릴께요.마치 이 말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처럼, 아니 이 질문을 오래전 부터 기다려온 사람처럼. 뻔하지 않은, 예상과 전혀 다른 대답을 한 후 전화를 끊는다. 전화를 끊은 후에 내 행동을 내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왜 망설였을까? 갑작스럽게 가을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분다.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은행알들을 툭툭 떨어뜨리고 나뭇잎들은 흔들거린다. 무엇이 흔들리는 것이냐? 나뭇잎이냐? 바람이냐? 은행알이냐?

흔들리는 것은 내 마음뿐. 우연은 없고 모든 우연은 알고보면 결국 필연이다. 그리고 모든 결정은 항상, 언제나, 반드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 이런 방식으로 깨닫는 것이 내 직감이 지금까지 작동해 온 방식이다. 우연을 믿지 못하는 것, 우연을 필연이라고 느끼는 것. 그 느낌이 직감이다. 직감, 바람, 전화, 달콤한 인생......난 전화를 쉽게 끊지 못했고, 바람은 오늘따라 우연히 내 눈앞에서 세게 불었으며, 나는 쉽고 뻔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은 흔들리는 것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중이다.   

by gosoo71 | 2008/09/26 21:34 | 영화와 연극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성서 속의 '요나'와 요나 컴플렉스



요나는 니느웨(앗수르의 대도시)로 가서 그 도시가 죄악으로 가득 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임을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요나는 니느웨로 가지 않는다. 예언을 하면 니느웨가 회개하여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욥바라는 곳으로 내려가 하나님을 피할 생각으로 니느웨와 반대 방향(다시스)으로 가는 배를 타게 된다.

그러나 예기치 않던 거센 태풍이 배를 덮치고 뱃사공들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가 파손될 조짐이 보이자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뽑히고 말았다. 그는 태풍이 인 것이 배에 자신이 탔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다. 그의 요청대로 그를 바다에 집어던지자 태풍이 가라앉았다. 하나님의 명령으로 '큰 물고기'는 요나를 삼켰고 그는 3일 밤낮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고 한다. 고기 뱃속에서 그가 구원을 위한 기도를 올리자 물고기는 그를 "땅으로 뱉어 내었다"(요나서 2장). 그리고 다시 명령이 들려온다. "일어나 니느웨로 가라." 요나의 예언을  들은 니느웨 왕과 모든 사람들은 회개하였다. 
 

요나는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 회개하는 인물로, 이 요나의 이야기에서 모태귀소본능母胎歸所本能 증상 즉 요나 컴플렉스가 유래되었다.보통은 소년기 이하 미성년자들에게 잘 나타나고, 과도한 폐쇄적 성격을 보이거나 유아기 혹은 아동기의 습관이나 퇴행적인 증상을 보인다. 쉽게 말해 어머니 뱃속 시절을 그리워해 현실에 적응을 못하는 것을 말한다. 병으로까지 여길 필요는 없지만, 다 큰 아이가 엄지손가락을 빠는 것도 비슷한 형태의 퇴행증상이라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검색 중에서-

주말 당직이 거의 격주로 있으니 교회에 가는 것도 격주로 가게 된다. 그나마 최대한도로 가야 격주이고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으면 삼사주에 한 번꼴로 교회에 가게 되는 셈이다. 만약 내가 열성적인 신자였다면, 이러저러한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자주 갔겠지만, 열성과는 거리가 먼 신자인 관계로 실제의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들을 핑계삼아 결교(?)를 즐기고 있는 편이다. 저 번 주 예배때 나온 성경 말씀은 요나서 였다. '요나'는 구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인물중 한 명이다. 설교 때 읽었던 요나서 일부를 집에 와서 다시 처음부터 읽어보면서 요나에 관해서 이전에 내가 알고 있던 지식 중 몇가지 잘못된 점을 발견했다. 첫번째는 요나가 여호와께서 니느웨로 가라는 명을 거역한 이유에 관한 것이다. 이전에는 요나가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다가 죽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해 주었을 것이다. 두번째는 위에 인용된 것처럼 요나 이야기가 요나가 큰 물고기의 뱃속에서 나와 니느웨로 가서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나가 재미있는 인물인 이유는 바로 이 두가지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과 관련이 있다. 우선 첫번째를 보자. 요나가 살고 있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점처 부강해지던 여로보암 2세 때였다. 니느웨라는 도시는 당시 경쟁국인 앗수르의 수도였고 요나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니느웨의 백성을 구원해줄 아무런 내적인 동기가 없었다. 이런 식의 비유가 좀 불경스럽긴 하지만, 신도들은 용서하시길, 여호와께서 한국의 예언자에게 일본 도쿄로 가서 도쿄 시민들에게 그런 식으로 신사참배 하다간 망할거다라는 예언을 전해주고 오라는 명령을 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당연히 요나는 가기 싫었다.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물론 심리적으로도 그랬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경쟁국이 구원받는 게 배가 아프기도 하고 니느웨 사람들이 무섭기도 했으리라. 두번째는 이 이야기의 결말에 관한 것이다. 우선 성경에 나온 이야기를 살펴보면 요나는 니느웨로 와서도 그닥 예언을 전하고 싶어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서 니느웨를 구하려 하자 요나가 버럭 화를 내었다고 성서가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으로부터 유추해보면, 목사님의 말씀도 그랬지만, 요나가 절대로 성심성의껏 예언을 전했을 리가 없다. 아주 형식적이고 성의없이 여호와의 뜻을 전했을 것이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후에도 여전히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게 왠걸, 요나는 대충대충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는데 니느웨 사람들이 진실로 뉘우치고 회개해 버린 것이다. 급기야 요나는 여호와에게 화를 낸다. 그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요나서 4장 1절-4절-

다시스는 니느웨의 정반대 방향에 있는, 원래 요나가 여호와의 명을 어기고 도망치려 했던 도시이다. 여기 나온 요나의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내가 원래 우리 마음 약한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품을 대놓고 비꼬는 인물도 요나밖에 없다- 벌을 못 내리실 줄 알고 다시스로 가려 한 것이었는데, 대체 왜 날 여기로 데려온 것이냐 차라리 죽여달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가고, 그러다가 잡히자 불성실하게 이행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자 급기야 신경질내면서 죽여달라고까지 하다니! 성서 어디를 뒤져봐도 요나 같은 인물은 없다. 그게 요나라는 인물의 재미있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요나 컴플렉스라는 용어는 왠지 요나서의 내용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성경을 참고해서 다시 정의해보면,

요나 컴플렉스: 뭐든지 자기 뜻대로 안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함. 가끔 자살도 시도. (여호와께 죽여달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만큼 확실한 자살기도가 있을까?) 

하지만 요나서가 알려주는 진짜 지혜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박덩쿨 이야기 속에 있다. 그게 뭐냐고? 길지 않으니 한 번 읽어보시길.
 
요나서를 읽는이에게 지혜와 축복이!

by gosoo71 | 2008/09/22 20:01 | 성서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서늘한 조건과 연극이라는 반사



1. 파블로프의 개와 서늘한 조건
2000년 가을. 대학로에 있는 어느 맥주집, 당시에 난 <로미오와 줄리엣> 연출이었고, 쫑파티 중이었다. 선배들이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자리에서 낙근이형이 그랬다, 아침에 잠에서 깰 때 이부자리 밑이 서늘해지면 공연할 때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말을 들은 이후로 '연극'과 '서늘함'이란 단어가 늘 내 머릿속에서 붙어다닌다. 초가을, 9월, 한가위, 이부자리 밑이 서늘해지는 때,  지금이 바로 그 때다, 공연을 해야하는 때.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화'는 '반사'로 나타난다, 물론 서늘해져서 입에 침이 고인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극단 미추에서 만든 <리어왕>을 보기로 한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늘함때문에. 글쓰는 사람 중에서 셰익스피어 만큼 잘 알려진 인물은 없다. 하지만 정작 셰익스피어의 작품 만큼 잘 안 읽히는 작품도 드물다. 길지도 않은 작품이 안 읽히는 가장 큰 이유는? 어려워서? 글쎄......아마도 정답은 그가 쓴 것이 희곡이기 때문이리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희곡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드물며, 혹 희곡을 읽는다 하더라도 내용을 잘 따라가면서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희곡보다는 영화를 통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알게 되었을 것 같다. 

2. 혼란스러운 원작과 더 혼란스러운 연극
<리어왕>은 어렵고 혼란스러운 작품이다. 혼란스런 원작을 선택한 미추의 연극 <리어왕>은 더욱 혼란스럽다. 같이 보러 갔던 준호가 지적한 것처럼 연기의 기본적인 원칙들이 지켜지지 않는 것, 답답한 발성, 혼란스럽고 산만한 동선, 어색한 말이 이 연극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몇가지를 지적해보자면, 이 연극은 원작이 갖고 있는 의문점들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첫번째는 왜 코딜리어는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말을 못하는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리어왕의 모든 비극은 이 단순한 사건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연극에서 코딜리어가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 <란>에서는 막내아들(이 영화 속에서는 세딸이 세 아들로 바뀌어서 나온다)을 자유분방하면서도 직언을 서슴치 않는 인물로 설정 하였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 코딜리어는 절대 악인 두 언니(거너릴과 리건)에 대비되는 절대선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착하디 착한 코딜리어를 등장시켜서는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없다. 절대 선, 이를 테면 아버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 같은 효녀 심청 코딜리어가 왜 그 별것도 아닌 '아버지를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할 수 없는가. 
두번째는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서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햄릿이 '복수'에 관한 이야기라면, 오델로는 '질투'에 관한 이야기이고 맥베스는 '권력욕'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리어왕은? '효(孝)'에 관한 이야기? 하지만 효성스러운 코딜리어나 불효한 두 언니(거너릴과 리건)들이나 모두 죽는다. 더군다나 두 언니를 죽게 만든 것은 '불효'가 아니라 '부정(不貞, 간통)함'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말만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건 주제라고 하기에는 좀 초라하고...... 성급한 성격은 파멸을 부른다? 물론 리어의 성격을 구축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성격의 결함이 인간을 파멸시킨다는 것은 셰익스피어가 비극을 만들 때 흔하게 쓰는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리어왕>도 그럴까? 좀 달리 생각해 보면, 리어왕의 몰락이 자신의 성격때문만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두 딸들의 탐욕이 작품 속에서 분명하게 주어진 것이라면 리어의 비극은 자신의 성격이나 과거의 행적과 관계없이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리어의 성격이 어떻든 그가 권력을 놓는 순간 딸들의 탐욕으로 인해서 비극은 시작되었을 거라는 얘기다. 

셰익스피어가 <리어왕>을 통해서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리어왕이라는 한 개인의 몰락과 파멸이 아닌 리어왕국이라는 거대한 조직의 붕괴와 파멸이었을 것이다. 코딜리어의 추방-두 딸의 불효-에드먼드의 계략-프랑스의 침략 으로 이어지는 모순과 암투는 리어왕국이 붕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리어왕, 두 딸, 에드몬드는 배반과 부정함으로 이루어진 구체제의 일원들이고 이들의 몰락과 파멸은 리어왕이 아닌 리어 왕국의 붕괴를 의미한다. 결말을 한 번 보자. 리어와 세딸은 죽고 올버니(거너릴의 남편)와 에드거만이 살아 남는다. 결국 살아남은 것은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다. 배반과 부정으로 썩어가던 리어왕국, 즉 구체제는 붕괴되고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면서 연극이 끝나는 것이다.

3. Vocation-Vacation, SBS 스페셜 9월 7일 136회 '천직 찾아 휴가가요'
보케베케(voca-vaca)의 뜻이 '천직을 찾아 떠나는 휴가'란다. 천직이라고 하니 거창한 것 같지만 실제는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해보는 정도의 의미이다. 휴가기간 중에 컴퓨터 회사 직원은 목수가 되고, 중학교 선생님은 요리사가 된다. 미국의 경우, 보케베케를 하는 이들 네 명중 한 명 정도가 자신의 직업을 바꾸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보케베케가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학생 시절 내게 주어졌던 두 달이라는 연극 연습기간이 내겐 보케베케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서늘한 방학(vacation)과 반사(reflex) 같이 되어버린 연극, 어쩌면 이런 것이 천직(vocation)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천직이 평생동안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평생동안 그리워하게 될 일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by gosoo71 | 2008/09/09 14:31 | 영화와 연극이야기 | 트랙백 | 덧글(1)

너희가 쿵푸를 믿느냐




큰애가 커 갈수록 같이 할 수 있는게 많아진다. 즐거운 일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애가 크면 제일 해보고 싶은 게 야구 글러브를 끼고 운동장에서 캐치볼을 해보는 거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성우가 돌이 되기 전 쯤이었던 것 같다. 성우는 벌써 일곱살이 되었다. 야구공으로는 못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캐치볼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찌 어찌하다보니, 그때 그 시절 친구에게 했던 얘기가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캐치볼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혹 성우가 성인용 야구 글러브를 낄 수 있게 되고 공을 멀리 던질 수 있게 되면 가능해질까? 그 때가 오면 그런 걸 하기엔 내가 너무 나이 들어버리게 될래나? 

그때는 그때고 캐치볼은 캐치볼이다. 그것 말고도 큰 애랑 할 수 있는 일은 무지하게 많다. 축구, 농구, 유도, 야구 중계, 컴퓨터 오락, 맥도날드 가기. 그 중 제일 만만한 것은 영화보기! 영화보기 만큼 편한 게 또 있을까? 영화가 시작하면 아이들은 가끔씩 팝콘소리를 내면서 조용해지고 그때쯤 되면 나도 영화에만 집중하면 된다. 재밌는 영화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지루한 영화라도 상관없다. 오고, 가고, 기다리고, 보고, 그러면서 반나절은 가버린다. 아이가 좀 더 크면 영화가 끝나고 이것저것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캐치볼 말고도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더 느는 것이다. 재작년에 영화 <각설탕>과 <카>를 볼 때만 해도 영화가 한 시간을 넘어가면 힘들어 했는데 요즘에는 두 시간 정도 까지도 잘 견디는 것 같다. 사실 나도 두 시간이 넘어가면 지루하니 애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쿵푸팬더>와 <월E>.

<쿵푸팬더>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동물 캐릭터들- 호랑이, 사마귀, 원숭이, 학, 뱀- 은 쿵푸의 권법들인 호권, 당랑권, 학권, 사권과 연결되고, 이 영화속에서 의미심장하게 얘기하고 있는 '세상에 우연과 비법은 없다' 또는 '모든 우연은 필연이며 비법은 이미 네안에 있다'라는 메시지는 알쏭달쏭한 동양의(?)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쿵푸팬더, 쿵푸를 하는 팬더곰이라는 유치하고 성의없이 정한 것 같은 제목과는 달리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은근히 철학적이다. 물론 그 철학적인 메시지가 워낙 이 바닥에서 많이 써먹어서 닳고 닳은 것이긴 하지만......  무슨 일이든 간절한 것은, 심지어 그것이 식탐이라 할 지라도, 기발한 재주가 되며, 기발한 재주는 비장의 권법이 된다. 그리고 그 비장의 권법이 혹은 간절한 바램이- 영화 속에서는 포(쿵푸팬더의 영화 속 이름)의 식탐- 심지어 세상을 구하기도 한다. 근데 도대체 식탐을 어떻게 권법으로 만든단 말인가! 팬더권? 식탐권? 그것도 아니면 식권? 하지만 자세하게 얘기하진  말자, 그게 바로 이영화의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를 보는 재미니까! 
영화 <싸움의 기술>에서 전설적인 싸움 고수 오판수(백윤식)가 동네북 송병태(재희)에게 빨래짜는 걸 시키면서 "요게 싸움할 때 필요한 근육이야"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권법의 고수가 되는 비법은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울퉁불퉁한 몸을 만들고, 엄청난 거리를 뛰고, 필살의 주문을 외우고, 은밀한 곳에 먼지가 쌓인 채 숨겨져 있는 권법 책을 숙독하는 것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밥하고 빨래하고 설겆이하고 청소하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행위들 속에 있다. 덧붙여 술마시는 것 속에도 권법이 숨어 있다, 이름하여 취권! 알고보면 우리가 하찮다고 느끼는 모든 일들이 쿵푸인 동시에 공부인 것이다(쿵푸는 공부의 중국식 발음이다). 소림사 주방장이 요리가 아닌 무술의 고수를 칭하는 관용어이고, 그의 무술이 부엌일이라는 평범한 행위 속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바로 비법이다. 영화 속에 나온 용문서처럼, 화려한 상자 속에 고이 폼나게 모셔져 있는 성문화된(?) 비법따위는 없다. 쿵푸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이러한 동양적?, 아니 쿵푸적? 지혜가 늘 영화 속을 흐르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게 네 안에 있느니라-

소림사 주방장이, 또는 국수집의 식탐 배달원 팬더가 전하는 메시지가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속해 있는 이 평범하고 지루한 세계도 언젠가,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비범하고 신비로운 세계로 변할 수 있다는 실낱같은 믿음을 우리 마음 속 한켠에 심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 포처럼 국수집을 벗어나 갑자기 '무적의 5인방'이 사는 성 한가운데로 떨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 갑자기 세계는 전설이 되고 예언이 된다. 혹 그게 아니라면 지극히 평범한'나가 어느 순간, 전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소한 계기로 비범한 '나'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계기가 지독한 식탐이든 엄청난 비만이든 간에.   

그런 희망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그런 희망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갖는 것은 멋진 일이다. <쿵푸팬더>의 주인공 포처럼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면에서 모두 포이다.

by gosoo71 | 2008/09/04 16:29 | 영화와 연극이야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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